어제 여성의 날 기념으로 이 책 소개하려고 했는데....
하루 늦었습니다. ㅠㅠ
아래 내용은 예전에 독서모임 발표용으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읽어보시고 괜찮으시면 일독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저, 나일등 역, 은행나무, 2016
전체 16장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생각되는 2장, 3장, 4장, 11장, 14장, 15장, 16장만을 요약 정리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2장 호모소셜, 호모 포비아, 여성혐오
남자의 가치는 “남성 세계 내 패권 게임에 의해 결정”되며, 패권 게임의 승자가 되기만 하면 여자는 전리품처럼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평가를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여성이 스스로 지위, 부, 명예를 획득하게 된 이후이다.
그러나 여성들 사이의 패권게임에서는 반드시 남성의 평가가 개입하고, 남자들이 인정하는 여자와 여자들이 인정하는 여자의 이중기준이 존재하게 된다.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의 호모소셜(Homosocial)
세지윅은 “Between Men” 이라는 책에서 남성 간 성애인 호모섹슈얼과 성적이지 않은 남성 간 유대인 호모소셜을 구별하였다. 호모소셜을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성적인 것을 억압한 남성 간 유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호모소셜 속에는 호모섹슈얼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고, 호모섹슈얼이 포함된 호모소셜에는 위험이 따른다. 삽입 당하는 것, 소유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은 바로 ‘여성화 되는 것’이고, 이것이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즉 성적 주체의 위치로부터 전락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배제는 더욱 엄격하고 강렬하게 되는 경향이 있고,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이 가진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집단 내의 ‘계집’에 대한 마녀사냥이 격렬히 일어날 수 있으며, 이것을 호모포비아 라고 한다.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여야 하며 자기 여자를 (적어도 한 명 이상) 소유하는 것이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여성 혐오’라고 한다.
호모소셜리티는 여성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호모소셜리티가 여성의 차별뿐만 아니라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남성됨’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를 역으로 증명한다.
3장 성의 이중 기준과 여성의 분단 지배 – 성녀와 창녀의 타자화
여성혐오에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바로 어머니이다. 여성혐오에는 여성멸시 뿐 아니라 여성숭배라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성의 이중 기준 (sexual double standard)
성의 이중 기준이란 남성 대상의 성도덕과 여성대상의 성도덕이 서로 다름을 뜻한다. 남성은 호색할수록 높게 평가되나, 여성은 성적으로 무구하며 무지할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이 기준은 여성을 두 종류의 집단으로 분할하게 된다. 성녀와 창녀. 등등.
‘생식용 여성’은 쾌락을 빼앗긴 채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쾌락용 여성’은 쾌락에 특화되어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 여기서의 쾌락은 남성만의 괘락만을 의미한다.
‘분할하여 통치하라’. 이것은 지배의 철칙이다. 분단해 놓고 서로 대립시킨다. 성녀와 창녀는 여성 억압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며 양쪽 모두 ‘타자화’에 불과하다. 성녀는 창녀취급하지 말라며 창녀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고 창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을 통해 아마추어 여성의 의존성과 무력함을 비웃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남성에게도 기묘한 희비극을 낳는다. 특정 여성에 대해 진심일 경우에는 그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반대로 성의 대상으로 볼 경우 상대를 진심을 대해서는 안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4장 비인기남과 여성 혐오
성적약자론
최근 대두되는 성적약자론은 연애와 성 시장의 규제 완화, 성의 자유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연애 자원의 독점 현상과 더불어 성적 강자와 성적 약자가 태어나고, 일부 ‘인기남’에게 여자가 집중하여 ‘비인기남’은 여자들이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어는 성별이 ‘남성’으로 전제되어 있을 뿐 여성 ‘성적 약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여성 중의 성적 약자들은 ‘추녀는 여자가 아니다’ ‘성적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여자는 여자 자격이 없다’는 기준에 따라 ‘성 시장’의 플레이어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성 시장의 플레이어에는 분명한 젠더 비대칭성이 있는 것이다.
남성에게 ‘인기’가 다른 모든 사회적 요인을 웃도는 이유는 여자 친구가 있어야 ‘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남성 집단의 정식 멤버로 인정됨으로써 최초로 남성이 되는 것이며 여자는 그 가입 자격을 위한 조건인 것이다.
게다가 남성에게 있어 여성의 최대 역할은 자존심 수호 역할이다. 남성들에게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남성 우위를 지킴으로서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이며, 이렇게나 무르고 불안한 것이 남성의 아이덴티티이다.
11장 여학교 문화와 여성 혐오
여학교 문화에는 이중 기준이 있다. 이중 기준 속에서 남자가 보기에 괜찮은 여자와 여자가 보기에 괜찮은 여자는 다르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에게 부여하는 가치는 남성이 여성에게 부여하는 가치에 비해 이차적인 가치밖에 없다.
학업성적의 우열과 여성성의 우열은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교 문화 연구의 성과들은 이 두 가지 평가 사이에 분열생성이 성립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여성성이란 자원은 스스로 획득하는 가치가 아니라 남성에게 선택되는 것에 의해 부여되는 가치이므로 사춘기의 소녀들은 성적으로 조숙한 행동하려고 하며 그것은 학교문화에서 일탈이 된다. 이렇게 학교 문화에 반항적으로 조숙한 그녀들이 영감쟁이 사회 속에서는 편리한 성적 객체가 되어 일회용 취급을 당하는 역설이 일어난다.
그와는 별도로 여학교 문화에서 인기를 얻는 가치가 있다. 씩씩하고 남자다운 소녀가 교실의 히어로가 되거나 웃음을 유발하는데 재능이 있는 소녀가 인기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여학교 속의 히어로가 이성애 제도 안에서 정체성 위기를 경험하는 일도 일어난다.
노파의 가죽이란 이 ‘여성 내 인기’를 얻기 위한 변신도구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성에게 인기를 얻는 여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세계는 이들 척도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남성에게 선택되지 못한 자신을 희화화 할 수 있다면 ‘루저=선택받지 못한 자’는 해학이 되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자학이 된다. 해학은 웃을 수 있으나 자학을 웃을 수 없다.
14장 여성의 ‘여성 혐오’ ‘여성 혐오’의 여성
여자가 여성 혐오를 자기 혐오로 경험하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은 바로 예외적 여자가 되어 자기 이외의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여성혐오를 전가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략이 있는데, 하나는 특권적인 엘리트 여성, 즉 남자들로부터 ‘명예 남성’으로 인정받는 ‘능력 있는 여자’가 되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고 하는 범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는 ‘추녀 전략’이다.
전자의 경우 특권적인 ‘예외’는 차별구조를 온존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게 한다.
후자의 경우는 여성스러운 여자들이 맞이하게 될 결과를 조소하면서 음습한 쾌락을 함께 나눈다. (여성혐오사회에서 맞이하게 될 여성스런 여자들의 불행을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 결국 예외 전략은 가부장제를 계속 유지하도록 만든다.)
15장 권력의 에로스화
근대 이후 이성애 커플인 ‘부부’의 성애는 정통성을 부여받고 특권화 되었다. 이는 부부의 유대관계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할 수 없었던) 성을 그 핵심에 위치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가족’의 탄생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부부 관계의 에로스화’라는 용어를 채용한다.
성을 공적세계로부터 추방하고 은닉하고 사적 영역, 즉 가족의 울타리 내에 가두는 것, 가족이 현저하게 성적인 존재가 된 것은 바로 근대 이후이다. 이렇게 하여 가부장의 지배 아래에 아내와 아이가 종속되는 ‘가족의 암흑 영역’이 성립된다. 프라이버시란 강자에게는 공권력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지배, 약자에게는 제3자의 개입 또는 보호가 인정되지 않는 공포와 복종의 장이 된다.
‘부부 관계의 에로스화’ 속에서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쾌락의 권리와 의무를 지게 되지만 그것은 오로지 남편에게만 행사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남성의 ‘쾌락에 의한 지배’가 성립하고 이는 ‘권력의 에로스화’가 된다.
‘권력의 에로스화’란 근대가 에로스를 비대칭적 젠더 관계, 즉 권력관계와 연결시켰다는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리고 젠더가 권력관계의 용어라고 하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의 황태자가 마사코씨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한 말이라고 전해지는 대사가 있다. “평생 모든 힘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소유’를 다른 말로 표현했을 뿐인 ‘지킴’이라는 말이 ‘사랑’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 ‘권력의 에로스화’이다.
16장 여성혐오는 극복될 수 있는가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란 남성이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남성은 성적 욕망의 주체, 여성은 성적 욕망의 객체 위치를 차지하며 이 관계는 남녀 사이에 비대칭적이다.
호모소셜한 집단이란 이처럼 ‘성적 주체’임을 서로 승인한 남자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여성’이란 이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오로지 남자들에게 욕망되고 귀속되고 종속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따라서 호모소셜한 집단의 멤버가 여성을 열등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이성애 질서의 핵심에 여성혐오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여성이 아니다’라는 아이덴티티만이 남성다움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를 넘어
여성 혐오를 극복하는 길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남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다.
전자에 관해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페미니스트란 여성 혐오자다’라는 설이 있다. 맞다.
첫째 이유는 여성 혐오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여성혐오를 신체화 하지 않는 여성은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페미니스트란 스스로의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려하는 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남성의 자기 혐오
남성학은 젠더의 속박에서 남성 역시 고통받아왔다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남자가 충분히 남성적이지 않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고통일 것이다. 성적 약자, 비인기남, 프리터, 히키코모리 등의 ‘남성문제’는 호모소셜한 남성 집단의 규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다.
남성이 남성 혐오를 넘어설 방법은 신체의 타자화(신체의 주인으로서의 주체=자기를 과시할 필요)를 그만두는 방법밖에 없다. 남성‘주체됨’의 핵심에 ‘여성(과 여자같은 남자)’의 타자화와 배제를 위치시키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남성으로 태어난 이에게 그것은 ‘남성적이지 않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싸워 이겨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남성’으로 분류되어 있는 자들이,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여자들이 여성 혐오와 싸워왔듯이 남자들도 자신의 여성 혐오와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