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로라 > 검고 어두운 세상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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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의 추천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은희경의 책이 발랄한 특징을 가지는 브랜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책은 검은색으로 착색일 된 것 같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런 류의 뜻을 담은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장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검은색. 그 칙칙함... 그런 느낌을 담고 있는 책은 어떤 것일까... 저는 칙칙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학이란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욱 깊은 감동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삶의 연륜이 더 깊어지면 다시 희극을 더욱 깊일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제 연륜이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이 책은 충분히 어둡고, 아프고, 힘든 삶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픈 이야기, 내가 원했던 바로 그런 책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 속에는 어쩌면 그런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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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컬리 > 타인의 삶, 이웃의 삶 그 다름을 메워버린...
그집앞
이혜경 지음 / 민음사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길위의 집'을 통해 처음 이혜경씨를 만났을 때만 해도 젊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한 7년 정도 지나고 나니 젊은 작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중견작가라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연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글은 치기어린 젊음에 비해서는 점잖고, 노년의 넉넉함에 비하자면 조금은 각박하다. 하지만 그녀의 글에는, 수다떨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는 편안함 속에 생활의 팍팍함과 신산스러움 앞에서도 절대 비껴서거나 둘러가지 않는 강직함이 있다.

이 책에서 그려내는 여러가지 일상과 현실은, 적어도 내게는 눈돌리거나 보면서도 못본척 하려했던 삶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살지는 않으리라, 설마하니 내가 저렇게 청승맞게 살 리가 있을까하며 애써 외면해 왔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못난 삶도 있음에 적잖이 위안도 받곤하던, 철저한 타인의 삶이었다.

그런데 살갑게 풀어내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놓고 고분고분 귀기울이고 있노라면, 이건 타인의 삶이야 라고 밀어놓은 삶의 모습들이 어느새 우리 옆집 혹은 앞집의 사는 모양처럼 성큼 다가와 버린다. 표현하기 나름이었던가, 타인과 이웃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내 사는 모양도 내 이웃의 사는 모양과 많이 닮아 있었는데 나혼자서만 애써 아니라고, 그래도 나는 저보다는 낫다고 우기고 있었던건 아니었는지.

길위의 집 이래 정말 오랫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속이 깊어졌다. 그래서 감추려들면 들수록 훤히 내보이는 속을 어느새 물끄러미 바라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추하고 그악스러운 속을 내다보면서도, 눈길을 돌리지도 동정어린 기색도 띄우지 않는다. 그저 이웃집 꼬마아이 뺨에 묻은 검댕을 닦아주듯 그 속을 보듬어 버린다.

나는 이혜경씨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삶의 고단함과 지리한 일상도 아무렇지도 않게 담아내는 무던함이 좋고, 요령부리지 않는 미련함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삶의 상처를 매만지는, 툭박스러우면서도 온기어린 그녀의 손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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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하기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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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교육 지침서 『기저귀부터 데이트까지(From Diapers to Dating)』를 쓴 데브라 해프너가 이같은 성교육 지침서를 쓰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오래 전 일인데 생후 18개월 된 딸을 데리고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Geogia O'Keeffe)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던 중의 일이었다.

오키프의 작품을 보고 있던 그녀의 딸이 갑자기 오키프 대표작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딸의 목소리는 갤러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녀의 딸은 “엄마, 저것 봐. 벌바(vulva)야!” 라고 외쳤다. “Vulva”가 뭔지 모르는 분들은 영어 사전을 구입하고서도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던 분들일 게다. 통계 조사된 바는, 물론 없겠지만 통계를 내보면 섹스(SEX)를 제외하고 영어사전 검색 순위 10위 안에 틀림없이 들어갈 만한 단어가 바로 이 말이다. 아직도 이 말의 뜻을 모르는 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찾아보시기 바란다.

미국의 유명 화가이자 여성인 조지아 오키프의 ‘꽃잎’ 그림들은 본의든 아니든 종종 앞서의 에피소드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오키프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와 같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데브라 헤프너의 딸의 눈에 비친 것처럼 그녀가 그린 작품들은 간혹 여성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vulva”는 해부학적으로는 여성의 외음부(外陰部)를 의미한다.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vagina”는 질(膣), 즉 음문(陰門)을 의미하지만, 이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Vagina”는 여성의 복잡한 성기구조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는 질이나 음부 자체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어린 소녀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보지”란 말을 했을 때(“vagina”나 “vulva”는 실감이 안 나므로), 그 어머니가 한 여성으로 느꼈을 당혹감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자 아이들의 돌 사진 중에는 성기를 드러낸 사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반해 여자 아이들의 돌 사진에서 그런 사진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최근에는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도 가려주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적인 폭력을 경험했던 저자 이브 엔슬러가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뉴욕으로부터 보스니아의 난민촌에 이르기 까지 각계각층의 여성 2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만약 이브 엔슬러가 사회학자였다거나 인류학자였다면 책의 내용이나 형식도 달라졌겠지만, 이브 엔슬러는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몇 년 전부터 국내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연극의 원대본인 셈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서문을 통해 나는 영어로 여성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가 우리말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하나의 사물 혹은 부위에 대해 표현하는 단어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친밀한 대상이란 뜻이지만, ‘보지’도 과연 그런가? 스타이넘은 “그런데도 나는 여성의 성기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들어보지 못했고, 긍지를 느낄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브 엔슬러가 이른바  “보지의 독백”이라고 옮길 만한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쓴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성별(性別)을 불문하고 어떤 한 인간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이 어떤 한 개인이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성(性)으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지니도록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의 뜻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가장 정치적인 텍스트이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고 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자신과 분리해서 사고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나의 손”이라고 느끼는 것, 내 “몸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며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분열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강제되고, 은폐될 때, ‘여성’으로 분류되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강제하는 ‘남성’사회도 더 크게 느끼지 못할 뿐 왜곡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끝으로 남성의 성기도 공공연히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상황인데 어째서 여성들의 성기만이 연극으로 올려지고 이야기되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여성의 성기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 그것이 허락될 만큼 충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닌 - 주변의 여성에게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경우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함께 싸우면 될 일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보지’(말하면서도 영 쑥스러운 나 자신을 느끼지만)를 죄의식 없이 느끼도록 하는 정신적/육체적 해방과 동시에 정치적/문화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엔 좀더 복잡해서 스스로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척하면서 구태여 원치 않는 상대에게 과도한 언어노출을 시도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중층적인 심층구조(deep structure)란 것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란 것은 확실하다.  독백을 극복하는 건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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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굴레 안에서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동안 좋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절판의 아픔을 겪어서 독자들과 만날 수 없었던 작품들이 대거 재출간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아직도 묻혀져있는 절판된 좋은 작품들이 많으니 미야베 미유키의 <인생을 훔친 여자(혹은 화차)>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다. 사실 나는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를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녀의 작품이라곤 <이유>만 읽어봤다. 하지만 그 책 한 권만으로 그녀는 나를 사로잡았고 절판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보게끔 만들었다.

  내가 전에 읽었던 <이유>에서는 부동산 경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책에서는 개인파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한참 시끄러운 문제로 떠오르는 이슈라 시간차가 좀 나는 작품임에도 그렇게 거리감이 들지는 않았다. 신용카드의 남발, 사채, 돌려막기 등. 우리가 한 번쯤은 매체를 통해 접해본 내용들이 바로 이 책의 소재이다.

  사건의 발단은 휴직 중인 경찰 혼마에게 아내의 먼 친척 가즈야가 찾아와 사라진 약혼자인 세키네 쇼코를 찾아달라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혼마는 세키네 쇼코를 찾으면서 그녀가 사실은 다른 사람의 삶을 훔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혼마는 가즈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는 화를 내며 손을 뗀다. 하지만 혼마는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때문에 차마 손을 떼지 못하고 계속 그녀의 뒤를 쫓는다. 그녀의 삶, 그녀가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아 살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 그리고 빼앗긴 삶을 살았던 여자의 삶.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둘이지만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굴레에 갖혀 끝없이 끝없이 고통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지겹고 괴로운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의 인생이라도 훔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동정이 가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혼마가 세키네 쇼코의 삶을 살고 있는 여자의 뒤를 쫓는 것이다. 원래 세키네 쇼코의 삶이 어땠는지, 그녀가 어떤 여자였는지에 대해서 조사하고, 그녀의 삶을 빼앗아 살고 있는 신조 교코의 삶을 추적하고, 그녀가 어떤 여자였는지 조사한다.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던' 두 여자의 삶. 이야기는 아직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이 남은 채로, 아니 어쩌면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시작될 법한 지점에서 끝이 난다. 때문에 독자들은 더 궁금해할 수 있고, 작가는 독자에게 좀 더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너무 그 문제만을 파고들어 해설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 속에서 살고 있는 개개인이 '인간'에 대한 조망이 있었기에 잘 쓰여진 소설로 손색이 없는 느낌이었다. 평범한 개개인의 삶이기때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소재들을 다루고 있기때문에, 더 섬뜩하고 더 무서운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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