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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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는 벌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와 같다. 그것은 차라리 버러지일지도 모르겠다. 정민 선생님 책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지만 책 좀 좋아한다는 사람으로 대한민국을 산다는 게 녹록치 않다. 도서 관련 일을 하면서 벌이도 시원찮고 그마저도 책 사보는데 쓴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표현할 방법이 없어 리뷰를 쓰며 시간을 보낸다. 「책벌레와 메모광」은 한 책벌레, 한 메모광이라 할 수 있는 선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 옆에 슬그머니 나란히 서면서 묘한 위로를 얻는다.

 

이 책의 저자 정민 선생님은 미국의 한 도서관에서 일본 고서를 빌려 읽다가 은행잎을 발견한다. 100년 전 일본의 어느 가을 날 이 책을 사랑한 어느 옛사람이 책벌레를 막으려 은행잎을 넣어둔다. 그 덕에 그 책은 그렇게 남아서 저자를 만나고 은행잎 향기를 전한다. 100년의 시간을 넘어 이어지는 묘한 마주침이다. 낙엽 지는 계절이 오면 잘 마른 낙엽들을 주워와 책갈피에 꽂아두고 했다. 이런 오랜 풍습에 이런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이 뭉클함을 준다. 시카고대에서 하버드대로의 대출로 얻은 한 책에는 모기 유해가 대량 발견된다. 몇 쪽 건너 한두 마리씩 10여 마리의 모기들이 책 한켠에 붙어있다. 이번엔 100년도 더 넘은 청나라 어느 여름날의 흔적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건데 피는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식사 전에 비명횡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층에 남겨진 화석처럼 선비는 이 책을 읽고 우리는 이 책에 새겨진 시간까지 읽는다. 책을 향한 이정도의 마음 씀이나 살신성인을 감수해야 어디 가서 책벌레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무도 조선에서 둘째라가면 서러울 독서광이었다. 그는 자신의 메모를 묶은 책의 이름은 「앙엽기」즉, 항아리에 든 잎사귀 이야기로 지었는데 여기에 엮힌 이야기가 있다. 한 가난한 중국 선비는 농사로 생계를 이었다. 김을 매면서도 생각이 자꾸 떠올라 메모는 해야겠는데 농사일은 많고 가난해 종이도 없었다. 그는 고심 끝에 밭 가운데에 항아리를 묻고 붓, 벼루와 감잎을 따 넣어두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가 있다. 중국에서 견문하면서 틈틈이 베끼고 메모한 것들을 따로 추려 묶은 것이다. 이는 이덕무의 「앙엽기」를 벤치마킹 한 것이다. 연암은 말안장 주머니에 공책을 넣어두고 길가는 도중에도 메모를 했다.

 

잘 알려진 다독가 정약용도 메모광의 이름에 오른다. 다산은 깨알같이 메모를 하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산의 메모에는 날짜 뿐만 아니라 날씨와 그날의 컨디션까지 적혀있다. 조카에서 보내는 글이라 운을 띄우는 메모도 많이 발견되는 데 다산의 마음까지도 전해지는 것 같이 괜스레 절절하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다. 책과 그 책에 메모들로 남아있는 다산의 몰입의 시간들과 그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이 책과 읽고 있는 나 사이에 묘한 이어짐을 느낀다. 아니 느끼고 싶다.

 

책벌레와 메모광들 외에도 고전이 우리 손에 들어오기 까지 시간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생계를 위해서 책을 베껴 주는 일을 했던 용서인들의 서체들과 책벌레가 슬지 않도록 내 놓아 쪼인 그날의 햇빛들이 스며들어 있다. 모기와 사투를 벌이면서도 몰입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이 책을 읽은 나의 리뷰를 읽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런 묘한 연대감이 있다는 것에서 위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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