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페티시즘 - 욕망과 인문의 은밀한 만남
이원석 지음 / 필로소픽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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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고전에 범재를 천재로 만드는 주술적 마력은 없다. 고전의 정수를 10년 이상 판 분들의 현실은 보따리장수로 지역을 순회하는 것이다. 시간 강사로 불러주는 곳을 찾아 방방곡곡을 누빈다. 고전 성공학에 따르면 문사철로 10년 이상 연구하며 고전을 탐독한 사람들이 먼저 성공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할 뿐이다.

관점을 바꿔 대중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지 보기로 한다. 대중은 성공에 대한 강력한 약속에 열광한다. 용이 되어 개천을 날아오르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조사에 응한 사람들 중 56.5%가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로 부모의 경제력을 꼽았다. 인문고전 독서론이 유행하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은밀한 비결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기계발 비책의 하나이다. 그리고 많은 자기계발의 테크닉이 그러하듯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근거가 부실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이 약속의 현실성을 보지 못한다. 그 만큼 지금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버거운 탓인지도 모르겠다. 고전의 복음이 주는 달콤함에 넘어갈 준비가 이미 되어있는 것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기도하는 손을 자르라는 것은 그 손으로 경전을 집어 들고 독서하라는 것이다. 독서는 혁명이다. 그 결과는 대체로 독자의 기대와 예측을 벗어난다. 반면 자기계발의 일환에서 책을 집어 드는 건 독서하는 손이 아니라 기도하는 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 성공학은 현실에 대한 부인이다. 이것은 마치 타조가 모래에 고개를 묻고 적이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시장 속 인문학은 날로 흥하는 데 대학 속 인문학은 위기를 부르짖은 지 오래다. 인문학도 시장의 맥락에 따른 평가 대상이 되고 비실용성을 추구하던 학문은 시장에 의해 요동하게 되었으니 인문학을 전공한 이들이 사회에서 자리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학생이나 교수나 자본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대학은 시장과 충분한 간격을 갖지 못하고 그 자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배움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시대를 직시하고 외치는 대학의 이상을 지켜나갈 대학은 대학 밖의 대학일지도 모른다.

배움의 공동체가 대학 밖에서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다. 분명 아직까지는 명사나 스타들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강신주의 이름 값 덕분에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같이 읽는 정도의 상황이다. 내내 비판을 쏟아내던 저자는 그럼에도 인문학 모임들이 지금과 같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직접 읽고 씨름하는 모임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자기관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인문학은 어떻게든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그 오랜 역사동안 계속될 수 있었던 인문학 자체의 저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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