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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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남자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연산군이 장녹수의 치마폭 안으로 기어 들어가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알랭은 처음부터 끝까지 배꼽에 대한 강박증 비슷한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마치 ‘잃어버린 배꼽을 찾아서’다. 배꼽은 탯줄이 잘리고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의 상처다. 알랭에게 어머니가 부재해서, 어머니가 사랑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연적으로 가슴에 뚫린 구멍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헤겔은 진정한 유머란 무한히 좋은 기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해, 오로지 무한히 좋은 기분이라는 저 높은 곳에서만 너는 사람들의 영원한 어리석음을 내려다보고 웃을 수 있는 거라고.”(99쪽 중에서)

하지만 인간은 결코 무한히 좋은 기분을 누릴 수 없다. 어머니가 오면, 사과를 건네면 누릴 수 있을 것 같겠지만 환상이다. 언어가 아닌 말로 순수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도 환상이다. 정말 어머니가 배꼽을 눌렸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눌렀다 해도 그 때 그 아이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성인이 되고 어머니란 존재와 모성애란 걸 알고 난 후 자신이 어머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떠났고 우리는 본래 정서적 고아다.

 

무의미의 축제라고 했을 때 우리의 욕망과 결여를 결코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삶이 무의미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무 의미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농담이나 거짓말의 축제일지도 모르겠다.

다르델로는 자기 거짓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웃음 역시 이해가 불가능했다. 그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상의 암이 그를 즐겁게 했다.(19~20쪽 중에서)

다르델로는 좀 심하긴 했지만 우리 모두는 타인에게 비추어지고 싶은 나란 가면을 집어쓰고 산다. 나의 본래 얼굴이란 건 없다. 그렇게 바꿔 쓰는 가면들의 모습 그대로 다르델로이다.

 

뜬금없이 거짓말이 방문해 결여와 욕망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저 해석만 있을 뿐이다. 스탈린이 왜 그런 농담을 해대는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구에 있는 사람만큼 세계의 표상이 있다는 것. 그건 필연적으로 혼돈을 만들지요. 이 혼돈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까요? 답은 분명해요.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표상만을 부과하는 것. 그걸 내가 했지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커다란 의지의 지배 아래 놓이면 사람들은 결국 아무거나 다 믿게 되는 법이거든!”(116~117쪽 중에서)

현재의 의미는 미래에 있다. 흐루쇼프의 세계에서 화장실 대반란은 대변동의 시작으로 의미 잡힌다. 칼리닌그라드의 의미는 다른 도시들과의 대조에서 잡힌다.

“스탈린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기를 즐겼고, 같은 사람 몇에게 늘 똑같은 스물네 마리 자고새 이야기를 해 댔던 진짜 이유, 그건 아직 말하지 않았어.”

“그 이유가 뭔데?”

“칼리닌”(36쪽 중에서)

지금은 칼리닌의 세계이다. 그는 소소하고 구체적이며 개인적이고 불가해한 고통으로 번뇌한다. 소변과 맞서 투쟁한다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은 없다.

 

라캉은 속지 않는 자는 헤맨다고 말한다. 참으로 무의미한 세계지만 그 진실을 흘낏흘낏 외면한다. 스탈린은 이 멍청이 자고새들을 위해 자신의 힘을 다 낭비해버렸다며 와르르 무너진다. 그렇다 해도 오줌싸개 칼리닌과 숨바꼭질 하는 사냥꾼 스탈린은 너무한다. 막 갖다 붙여서 뭐하지만 웹툰 송곳에 나오는 악한 강자로부터 선한 약자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라는 말이 뭉클하다.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기 한번 못 펴보고 이대로 쭈글이로만 남을지 모르겠지만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해보고 싶다. 삶에 본래 아무의미도 없으니까 살아가는 순간순간들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모두들 비웃지만 나는 다르델로가 되고 싶다, 아직은.

배꼽을 말하는 작가는 치열하게 살아온 삶 이후에 다가오는 또 다른 깨달음을 담은 것이 아닐까 어림해본다. 혹은 모든 희망과 열정이 식어버린 이 시대를 보듬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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