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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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피로사회』살피고 들어간다. 성과사회가 도래했다. 'Yes. We can!'이 성과사회의 도식이다. 해냈느냐 해내지 못했느냐에 따라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만들어진다. 성과사회를 사는 주민들은 성과주체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그런데 이 기업가, 성과를 내라고 압박을 해대니 착취가 따로 없다. 매일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우울증 환자는 이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다그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파괴적인 자책과 자학이 찾아온다.

 

별안간 구조조정을 들이댄다고 해도 비정규직이란 이유만으로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해도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해도 나는 오늘도 안녕하다. 미리 대비해두지 않은 개인의 탓도 있다. 이 잣대는 나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든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하는 이 살벌한 서바이벌 시스템에서 20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기계발에 전투적으로 매달리는 것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자기계발 담론에 따르면 지금의 룰에 충실한 것이 개인에게 가장 합리적이다. 사회를 바꾸는 건 힘들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자신의 귀하디귀한 시간을 쏟는다는 건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러면 안 되잖아요.

 

성과사회는 푸코의 규율사회 이후의 사회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의 사회이다. ‘~하면 안 돼’가 규율사회의 도식이다. 이 사회는 학교와 병영, 공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은 사회의 무의식적 열망에 의한 것이다. 사회는 총생산성의 최대를 추구한다. 규율주체는 그동안 일을 잘 해왔지만 일정한 지점에 이르자 생산성에 한계를 드러냈다. 반면 성과주체는 보다 빠르고 적극적이다. 두 주체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성과주체는 규율단계를 완전히 마스터하고 졸업한 것이다.『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도 비슷한 언급을 한다. 아직 덜 아파봐서 청춘인 것이고 천 번은 더 맞아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 힐링 도서들의 말들은 기업 오너들에게만 좋은 이야기이다.

『피로사회』의 저자가 말하는 성과사회는 노동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가 사라진 사회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그런 기구들도 운영되는 사회이다. 성과주체를 강제하는 건 그 스스로 뿐이라고 하지만『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언급된 것처럼 기성세대는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고 말하며 사회구조의 모순을 지적하는 이들을 열심히 노력해보지 않고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로 취급한다.

 

이 책들이 20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는 그래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봐야하지 않겠냐며 힐링계발서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우리의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모두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들을 읽은 독자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최소한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내 탓이 아니라고 세상은 나를 냉소해도 나는 나를 다독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는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차별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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