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년 전 호기심 천국에서 동물을 가지고 한 실험을 했다. '과연 동물도 예쁜 이성을 더 선호하는가?'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강아지를 데리고 실험을 했는데, 그들은 깔끔하고 예쁜 이성을 택했다. 그리고 EBS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도 외모가 뛰어난(어른들이 보기에 누구나 그렇다고 동의할만한) 이성에게 더 큰 호감을 보였다.

 

이렇게 본다면 예쁘고 멋진 이성의 외모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본성 혹은 본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진화생물학적 입장에서 보자면 빼어난 외모는 이성의 성적 충동을 일으키므로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손 또한 빼어난 외모를 가질 확률이 높아져 많은 이성을 끌게 되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에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여타 동물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외모가 사랑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 인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그'는 한 없이 못생긴 그녀를 사랑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이러한 비현실적인 플롯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의 가정환경이다. 그의 아버지는 겉에 보이는 모습으로 먹고 사는 유명한 배우가 되었고 반면 그의 어머니는 정말 못생기고 힘든 일만 하여 그런 아버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초라한 여자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주인공은 인간의 빼어난 외모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반면 인간의 또 다른 면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외국의 어떤 나라보다도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곳인 듯 보인다. 미국이나 호주 등 서양의 경우에는 그들의 옷차림,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등이 각양각색인데 비해 한국에서는 획일화의 경향을 보인다. 다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보니 서로 간의 비교가 가능해지고, 더 나음과 더 못남이 나뉘어져 더 나음의 최상위에 있는 일부 연예인들의 모습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절대적 미라는 잣대가 존재하고 다양성은 부족한 상황에서 TV, 신문 등의 언론 매체는 더더욱 이러한 분위기를 조장하게 되고, 선천적으로 이미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는 후천적으로나마 시각의 다양화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 역시 펼치지 못하게 된다.

 

이 소설은 두 개의 결말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결말이든 가능하며 독자 역시 자신만의 결말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이나 작가가 제시한 두 개의 결말 모두 해외도피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역시 한국 사회 안에서만의 엔딩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고 납득가는 결말을 생각해내기는 어려웠던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