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마오의 나라 중국에 가서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하겠다던 우리 둘의 생각은 ‘추구의 플롯‘에서 흔히 등장하는 이른바 ‘외면적 목표‘였으 것이다.

높은 파도에 앞뒤로 흔들리는 쾌속선의 선실에서 나는 멀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멀미란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이 다를 때 오는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사회주의 중국은 내가 책을 보며 상상했던 나라와 너무도 달랐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살아가며 억압과 착취가 없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공산당이 지배하는 개발독재국가였다.

젊은 엘리트들은 미국을 선망하고, 인민들은 믿을 수 없이 초라하고 남루했다.

그때 겪은 정신적 멀미의 괴로움이 아직도 남아 잇었던 것이다. 중극은 그가 처음으로 가본 외국이었고, 젊은 날의 환상이 깨져나간 곳이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으ᇍ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지만 상쳐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이전 투숙객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전날 남겼던 생활의 흔적도 지워지거나 살짝 달라져 있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하며 발전해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

모든 기억은 과거를 편집한다.

엄청난 양의 정보들 중에서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만 적당히 편집해서 남기고 나머지는 어딘가에 던져두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읽고 다시는 펼쳐보지 않은 책인 것만 같다.

사상은 옥수수 같은 곡물과 달리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한곳에 머물기 어렵다는 것, 인맥이나 터전에 얽매인 직업, 대표적으로 정치인이나 농민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언어에 민감한 이들은 시시각각 낡아가는 언어들을 금세 감별한다.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 있을 때 왔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우리는 떠난다. 가서 거기 있고 싶어하고 직접 내 몸으로 느끼고 싶어한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관점을 따르는 출연자도 있다. 카프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현대의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누구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 아니 그 목적지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조차 모른다고 보았다.

그냥 현재를 즐기자,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바야르의 말처럼 우리는 간접적으로 타자를 통해 좀더 깊이 있는 여행을 경험한다. <알쓸신잡>은 이중, 삼중으로 탈여행을 수행한다. 나는 다른 출연자들의 여행을 우선은 현장에서 이야기로 듣고, 눈으로는 몇 주 후에 편집된 방송분으로 본다. 제작진들 역시 출연자들의 여행을 영상으로 뒤늦게 확인한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면 굳이 그림자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소설의 결말을 다시 읽어보면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돈이 그림자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람, 장소, 환대>의 관점에서 오디세우스의 귀향도 다시 읽을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그림자가 없는 상태, 걸인의 모습으로 이타케로 돌아온다.

자주 떠도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인류가 지구의 승객이라는 비유는 지금으로서는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당시에는 읽자마자 무릎을 칠 만한 것이었다.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매클리시는 이어서 우주의 이 끝 모를 차가움 속에서 우리 자신들은 형제, 서로가 형제임을 진실로 아는 형제라고 부연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명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이 망자를 대한다.

그 어떤 주목이라도 갈망하던 시절, 여행자라도 된다는 것은 그런 욕망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주었다.

오디에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어떤 무인도에 상륙하게 된다. ‘키클롭스들의 나라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이 섬에는 야생 염소들이 수없이 많이 살고 있다. 키클롭스들은 배가 없어서 바다를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안전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여행자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섬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오디세우스가 느낀 유혹, 키클롭스라는 타자를 향해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느냐가 성숙한 여행의 관건이다.

중독이 나의 시간을 많이 빼앗아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 생산력을 크게 좀먹은 것도 아니었다.

꾀 많은 오디에우스가 키클롭스의 동굴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는 <오디세이아>에서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여행자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면 흥미롭다.

나는 여행자의 바람직한 마음가짐으로 읽었다.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그는 섬바디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허영과 자만으로 화를 자초한 이후부터는 노바디로 스스로를 낮추었고 그 덕분에 고난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내게 있어서 어른이란 김찬삼처럼 여러 나라를 마음껏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적응을 위해 노력하다가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디에 있더라도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참사를 기록한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 나 남극 탐험을 떠났다가 조난을 당했지만 기적적으로 생환한 어니스트 섀클런 경의 이야기가 그랬다.

여행기는 모험 소설과는 다른 측면에서 나를 안심시켰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이 불안과 고통만은 아니라는것, 거기에는 ‘지금 여기‘에 없는 놀라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끝이 없다는 것. 여행기의 저자 역시 모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작은 사건과 사고들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낸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와 그것을 글로 기록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삶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구조, 핵심 플롯이 있다. 어린 날의 나에게 그것은 모험 소설이었고, 여행기였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죽음과 재난, 사랑과 배신 같은 일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올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지켜내야 하고 그럴 때 이야기가 우리에게 심리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글쓰기와 여행을 가장 많이, 열심히 해왔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쓸 기회가 많았지만 여행은 그렇지를 못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정말 많은 것들이 기억 깊은 곳에서 딸려 올라왔다.

‘여행의 이유‘를 캐다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든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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