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이 좋다. 존재. 보통의 존재. 글을 읽을수록 이석원이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작가를 쳤는데 많은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장편소설을 출판했고 얼굴을 새롭게 알았다는 것? 얼굴과 생각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이석원은 일생과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앞에서는 내 불행은 아무것도
아니다. 일생이 파란만장했고 그 고통을 남자는 달게 받는 것 같았다. 이석원은 고통이 가중될수록 음악이 잘 나온다고 했다. 나는 고통이 없는데
나는 창작 앞에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석원의 고독 부분은
애잔하다. 이석원의 외로움과 고통이 물씬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가가
안쓰럽게 느껴졌고 나는 이런 상황에 진저리가 난다. '누나들은 내 말엔 대꾸를 해주지 않았던 걸까.' 누군가 대화에 끼지 못하면 마음이 아프고 그 대상이
한없이 안타까웠다. 나라면 어떻게든 대화에 끼워주려고 했을
텐데.
수비가 중요하다. 나는 얻는 것보다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교통카드를 잃어버렸을 때 그때의 상실감과
찾으려 애쓰던 시간. 이어폰을 잃어버렸을 때 노래를 듣지 못한다는 걱정. 사소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때의 상실과 고통은 한없이 크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나는 수비가 한 열 배쯤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작가는 서점을 좋아했다. 혼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뼈저리게 공감한다. 나도 혼자서 도서관을 갔을 때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았고 내 마음대로 원하는 책도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가방의 무게는 천군 마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그때 딱 한 번 가고 가지 않는다. 핑계지만 너무 멀어서이다. 요즘 들어 자꾸만 도서관과 서점이 가까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