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과 사이코
스티븐 레벨로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나체 금발의 여인이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고, 샤워를 하고, 샤워를 한다. 샤워 커튼 너머의 낯선 그림자.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그보다 더 날카로운 칼날. 칼에 찔리고, 찔리고, 찔린다. 샤워 커튼에 뿌려지는 핏방울. 그녀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진다. 찔린다, 찔린다, 찔린다. 미끄러진다, 미끄러진다, 미끄러진다. 찢겨진 샤워 커튼. 욕조에 흐르는 핏물. 배수구 안으로 흘러드는 핏물.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금발 여인의 공허한 눈동자. 밖으로, 밖으로, 밖으로.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는 대단합니다. 소설 이야기나 영화 이야기를 할 때 종종 이미지화된 어떤 장면에 대한 감탄을 표하며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조금 묘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특정 느낌이 뚜렷한 이미지가 되어 풍겨져 나올 때마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장면들이 생각나고, 가끔은 혹시나 그 장면들이 히치콕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의 영화는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로서 장면을 담아놓은 영화가 아니라, 한 장 한 장 느낌 있는 사진들을 모아서 한데 엮은 느낌의 것입니다. 계속해서 의심해야 하고, 다음에 나올 장면들이 궁금해지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고, 그래서 파헤쳐보면 어떤 의미심장한 것이 가득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신비로운 영상. 필름으로 찍어놓은 장면들이 연속사진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은 한 장의 사진에 압축시켜 놓은 감정의 강도 자체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 그런 감정은 심연에 깊게 자리 잡은 원초적 본능의 감정, 그 중에서도 극한의 공포를 다룬 경우가 많습니다. 불길함을 증폭시키다 결국 혼돈과 죽음을 보이는 방식으로.

 

 

    장르 예술 분야에 있어서 주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연출의 서스펜스와 스릴러를 추구…, 아무튼 이 분야에 있어선 히치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해도 좋다고 봅니다. 또한 그의 대표작이자 세기의 영화 <사이코>가 그 분기점의 중심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히치콕 이후의 영화와 소설에선 그의 연출법을 흉내 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 대한 제작 스토리는 영화사뿐만 아니라 장르 문학사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스티븐 레벨로『히치콕과 사이코』는 영화 <사이코>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원작 소설의 선택과 시나리오 작업, 영화사와 배우들과의 계약, 제작 준비와 촬영, 편집, 영화 개봉 등의 이야기와 함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히치콕 감독과 영화에 얽힌 논픽션을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가볍게 들려줍니다. 그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영화 제작에 관련된 이야기가 꽤나 극적인 모습이라 흥미진진함을 느끼고 이야기자체를 즐기며 읽기에도 좋습니다. 영화 제작과 관련된 전문용어들이 현장의 느낌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내용의 글이라 영화광이라면 매우 좋아할 것 같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는 히치콕의 영화가 조금 오래된 느낌일지 모르겠습니다.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어지럽고, 감정이 ‘새’되는 일이 생겨 미쳐버릴지도 몰라 걱정이 약간 됩니다만, 영화 제작 이야기를 듣다보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서’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다시 찾아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곧이어 히치콕 감독의 영화 제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치콕>이 개봉할 것이라고 하니, 영화를 보며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좁은 공간에 알몸으로, 자기 혼자라고 느끼고 있다가 갑작스레 다른 사람의 침입을 받으면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죠. 나는 샤워 커튼이 옆으로 휙 걷히는 장면으로 장의 끝을 장식하는 효과적인 장치를 생각해 냈습니다. 칼이 그녀의 비명을 베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도. 충격적인 장면이죠. 당시에 나는 영화화를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 시절엔 이렇게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지 않았으니까요. (38쪽)

 

 

    나는 추리물을 다뤄본 적이 없습니다. 그전 그저 재미있는 퍼즐에 불과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 퍼즐을 풀려면 감정보다는 머리를 써야 하는데, 내 관객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건 오로지 감정밖에 없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고 끝나는 것보다는 서스펜스를 더 좋아합니다. 누구나 쉽게 몰입할 수 있으니까요.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탐정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기가 어렵죠. (55쪽)

 

 

    감독은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살인을 얘기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무조건 절제부터 하려 듭니다. 하지만 살인으로 이어지기 전까지의 사건들은 아주 가볍고 유쾌할 수 있어요. 살인범 중에는 매력적인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피해자를 유혹하려면 그래야 하니까요.” (77쪽)

 

 

    클로즈업-깜짝 놀란 아보개스트의 얼굴

    칼이 그의 뺨과 목을 휙 벤다. 피가 품어져 나온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는 균형을 잃는다. 뒤로 휘청거리다가 비틀비틀 계단 밑까지 내려간다. 그는 뒷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면서 난간을 잡으려 필사적으로 손을 더듬는다. 내려가는 내내 카메라가 그를 따라간다. 흉악한 칼이 계속 전경에 끼어든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면, 베이츠 부인의 검은 머리와 어깨가 전경으로 뛰어들고, 카메라가 접근하여 살인 무기가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모습을 포착한다. (226쪽)

 

 

    히치콕은 <사이코> 때문에 평단과 대중의 날카로운 분석 대상이 된 상황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1930년대부터 그는 이런저런 곳에 인용될 만한 재미있는 말들을 많이 해 왔지만, 사회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그의 공적 발언에 숨겨진 의미까지 따지고 든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영화가 표현한 도덕적 시각이 공개적으로 비난받은 적도 없었다. 심각하든 시시하든 어떤 사회 현상이 논의될 때마다 <사이코>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범죄율 증가, 불투명 샤워 커튼의 판매 감소, 폭력 사건의 급증, 모텔업계의 침체. 인터뷰를 할 때면 히치콕은 제임스 앨러디스가 써 주는 가벼운 이야기를 떠들어 대며 그 뒤에 숨었다. 히치콕은 오락영화감독이라는 가면을 자진해서 썼다. 그런 식으로 영화에 대한 비난들에 응수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309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