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광 녀석들 뱀파이어 러브 스토리 1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눈이 부실정도로 하얗고 투명한 속살. 가늘고 긴 목덜미는 어떠한 상징적 순결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저히 시선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그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매혹적인 아가씨. 끈적한 내 시선 때문에 조금 당황하고 놀란 것일까. 긴장한 그녀의 보송보송한 솜털 사이로 조금씩 배어나와 촉촉하게 젖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방울방울의 땀. 설탕을 친 철분처럼 달달하고 따뜻한 냄새. 들썩이는 어깨선의 리듬을 따라서 조금씩 가빠지는 숨소리. 창백한 내 모습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마세요. 아가씨,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단지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너무 빠져 흥분한 나머지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깨끗한 피의 냄새에 홀려서 그만…… 아! 빈혈.

 


 

    대개의 뱀파이어 러브스토리가 그렇듯, 섹시한 뱀파이어 남자와 섹시한 인간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반해, 크리스토퍼 무어의 뱀파이어 러브스토리『흡혈광 녀석들』은 섹시한 뱀파이어 여자와 조금 허접한 인간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책으로 여자의 심리와 연애에 대해 공부한 인간 남자, 토미.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새 출발의 기운을 담아 나름의 심층 분석 연구를 통한 여자에 대한 탐구 학습 결과를 실천에 옮기려던 찰라, 뜻밖의 여신이 연애 초보남에게 다가옵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핫’한 어떤 아가씨와 엮이게 된 일생일대의 기회. 오! 마이-갓! 그런데 그 상대가 바로 뱀파이어 조디라는 것이 함정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과거의 지루했던 일상이 지루해도 너-무 지루한 탓에 한번쯤 뱀파이어와 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지금의 흥분된 이 감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홍콩가게 할 정도로 뿅 가게 할 바로 그 맛. 달작지근하고, 끈적끈적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비리하기도 한, 바로 그 중독성 강한 악마의 맛 때문에 우리는 미친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이야기에서 보인 관계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묘한 감정들이 뱀파이어와 인간의 관계에선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피’라는 타산적인 이해로 엮긴 건조한 관계. 힘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지배와 피지배의 상황. 알몸으로 벗겨진 채 언제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긴장의 단계를 넘어서 매력으로 느껴지기까지의 초조한 시간들. 황홀한 섹스 이후에 느끼게 되는 공허한 감정. 함께 있지만 여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외로움. 간섭과 배려의 차이. 이해와 오해의 연속. 냉정과 열정 사이. 35℃와 37.5℃…….

 

 

 

    뱀파이어와 인간이든, 인간과 인간이든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합니다. 소설 속 커플이 보인 그러한 노력은 꽤 유쾌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묘한 미소를 짓게 하고 속으로 그들이 잘되길 응원하게 합니다. 소설에서 설명하지 않은 나름의 이유를 혼자서 만들어가며 이들의 관계를 합리화 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피로 물든 위험한 동거생활, 음란한 색칠 놀이의 끝이 궁금합니다. 흥미진진. 그러나 모든 러브스토리가 그러하듯 사랑은 언제나 가슴 아프게 합니다. 심장을 갈기갈기 찢을 정도로 날카로운 그녀의 송곳니, 그것은 결국에……. 아! 지긋지긋한 빈혈……, 어서 신선한 다음 책을 흡수해야겠습니다.

 

 

 



 

    조디는 생각했다. 왜 남자들은 여운의 유독성 방사선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 투덜대거나 머저리 짓을 하지 않고서는 끝을 맺지 못하는 걸까? 그들은 끝난 뒤의 포옹이 단순한 온기나 솜털 보송보송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몰라. 그건 섹스 후 들이닥치는 우울한 감정의 파도를 타는 가장 지적인 방법인데 말이야. (174쪽)

 

 

 

    조디는 생각했다. 이게 바로 뱀파이어가 생명체로 존재하는 방식일 거야. 그냥 경험하는 것, 직접적이고, 본능적으로, 말하지 않고서. 물론 기억하고 인식하지만, 단어는 갖지 않는 거지. 내가 가진 감각을 시인이 가졌다면, 그는 건물이 숨 쉬는 소리를 듣고 콘크리트가 나이 드는 냄새를 맡는 것이 무엇인지 묘사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겠지. 하지만 무엇을 위해? 아무도 그 음표를 연주하지 못하고 가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래를 만들어서 뭐하겠어? 난 혼자야. (244쪽)

 

 

 

    “무슨 혐의로?”

    “그건 애송이한테 물어봐야지. 중국 속담 몰라? ‘매일 아이를 때려라. 너는 때리는 이유를 몰라도, 아이는 자기가 맞는 이유를 알 것이다.’” (302쪽)

 

 

 

    뱀파이어가 일어나 조디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 다 끝나가. 애완동물을 가졌을 때 슬픈 점은 그것이 항상 네 눈 앞에서 죽는다는 거지. 오늘 밤이 끝날 무렵, 넌 혼자가 될 거야. 그때 감정이 어떤 건지는 금방 알게 될 거야. 자, 마시기나 해.” 뱀파이어는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348쪽)

 

 

 

    “미안해!” 토미가 외쳤다. “난 네가 무서워. 가끔 난 네가 너무 너무 무서워. 너를 상처 입히게 될지 몰랐어.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거야. 난 나를 특별한 존재로 느끼고 싶었어. 그런데 특별한 건 너였어. 난 내가 보는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내가 느끼는 방식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난 너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자랑하고 싶었어, 낮에도 말이야. 난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어. 사랑해. 난 너와 삶을 함께 하고 싶어.” (414쪽)

 

 

 

    “네가 내 심장을 찢어 놓을 줄 알았어.” (482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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