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매화
미치오 슈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고 방황하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야기는 모래밭 강변의 물길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이야기를 따라서 붉은빛 노을이 물든 강변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공기가 차가워져 입에선 하얀 입김이 조심스레 피어납니다. 그리고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옮겨 손등을 바라봅니다. 하얗게 변한 차가운 손엔 어디서 베인 것인지 모를 선홍빛 상처가 방울방울 맺혀 있습니다. 상처 방울은 손가락을 타고 내려가 끝에서 잠시 맺히더니 모래밭을 향해 그림 그리듯 뚝뚝 떨어집니다. 눈치 채지 못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그 아픔들이 그제야 한꺼번에 솟아올라 눈물로 모래밭에 그림을 그립니다.
한참을 그러고 강변에 서있으니 마지막 노을빛이 공허한 미소를 비춥니다. 그래서 등 뒤로 길게 늘어선 그림자는 후회입니다. 그리고 추억입니다. 잊고 있었던 슬픔이고, 부정하고픈 쓸쓸함입니다. 아니면 복잡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세상의 어떤 감정일지 모릅니다. 『광매화』는 표현하기 힘든 세상의 아픔들을 이야기합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다른 소설들처럼 『광매화』의 이야기는 막연한 불안을 만들어 낮게 흐릅니다. 심해를 유유히 떠다니는 잠수함에서 오로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뚜… 뚜’ 거리는 규칙적으로 울림뿐, 그 유일한 울림을 음파탐지기를 통해 듣는 것처럼 슈스케의 소설은 낮은 위치에서 다른 소리들이 소거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다 고요하고 평온한 심해에 갑자기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큰 소리로 내지르는 비명소리, 그 소리는 한 아이의 비명이지만 아이 같은 어른들의 비명이기도 합니다. 곧 바로 해드셋을 벗어 던지는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소름 돋게 만드는 심해의 끔찍한 소리를, 여전히 아이 같이 순수한 표정을 한 채 태연하게 들려줍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추리소설이나 섬뜩한 분위기의 공포소설은 아닙니다. 『광매화』는 세상의 상처를 이야기하며 그것을 치유하려는 성장소설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조금 독특합니다. 훈훈함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슈스케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영혼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얼굴의 악의가 이야기 도중에 순간적으로 불쑥 솟아올라 섬뜩함을 만들어 내는데, 이 부분이 참으로 묘한 느낌입니다. 막연히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런 불안함에 쫓겨 도망치다 보니 한참동안 이야기에 빠져 정신없이 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급히 해치워 끝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편, 소설을 어떤 감각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진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동물, 곤충, 식물들의 이름에 대한 숨은 의미가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여 하나의 풍경을 만듭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맡고, 귀로 듣는 소설의 이미지들. 그런데 이런 소재가 만들어 낸 풍경이 꽤 좋은 느낌입니다. 미스터리 소설이 만들 수 있는 배경, 그 이상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소설의 미스터리한 사건은 사건 자체가 하나의 깨달음을 만들어 내는 독특한 구조를 보입니다. 여섯 가지의 에피소드가 돌고 돌아 하나의 연작 형태로 엮이는 모습 역시 매우 좋습니다.
상처를 건드려 치료하는 것보단 시간을 두고서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치유의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래밭의 그림을 발끝으로 훼훼 저어 지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강변 물길을 따라 다시 걷습니다. 바람을 따라서. 나비를 따라서. 이야기를 따라서.
…침으로 범벅이 된 장식용 풀을 목구멍에서 끄집어내며 대체 왜 이러시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그저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의 준비는커녕 이렇다 할 배경지식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13쪽)
곤충은 항상 빛을 같은 방향에 두고 날아가는데 그 빛이 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똑바로 날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빛이 작으면 그러지 못해. 작은 빛을 늘 같은 방향에 두려고 하면 곤충은 그 빛을 중심으로 빙빙 돌게 돼버리거든. 그러면서 그 원이 점점 작아지지. 그러다 보니 이렇게 작은 빛에 머리를 계속 부딪치는 거란다. 주변이 밝아져서 이 빛이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84쪽)
그때 사치가 품었을 생각을 당시의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헤아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사치가 더는 나를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왜 늘 만나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다리 아래에 있었을까? 나와 만나기 싫었다면 구태여 다리 아래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제방 근처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도 됐을 텐데. 가을날 강변 모래밭에 서 있던 내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110쪽)
풍매라는 한자를 풀면 바람 풍에다가 중매할 때의 매를 쓰거든. 바람으로 꽃가루를 운반하는 꽃이야. 풍매화는 화려한 외관을 가질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일부러 자신을 꾸며서 곤충을 불러 모으지 않아도 되니까. 바람이 화려한 색깔이나 눈에 띄는 모습에 이끌려서 불지는 않잖니. (210쪽)
그런 고민을 나는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고 착각하고 ‘교사’ 흉내를 내며 상냥한 척 웃는 얼굴로 무마하려고 했다. (276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