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강한 현실성을 갖고 시작합니다. 『고요한 집』에서 역사학자로 등장했던 파룩이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과거 기록을 들려준다는 식의 이야기로 소설의 서문을 열기 때문입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부터 시작된 오르한 파묵의 소설 세계가 뿌리를 내리며 더욱 견고한 어떤 왕국을 이루어 가는 모습. 결국 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거대한 제국이 하나의 ‘박물관’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독자들에겐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17세기 터키. 오스만 제국 함선의 공격을 받고 이탈리아 학자 한 명이 터키의 노예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그 노예는 호자라는 이름의 터키 학자의 눈에 띄어 부름을 받습니다. 호자는 자신과 쌍둥이처럼 꼭 닮은 노예로부터 서양의 지식과 지혜를 얻고 함께 토론하며 학문을 연구하길 바랍니다. 또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길 요구합니다. 그 둘은 세상의 모든 원리를 알아야만 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열정을 품고, 유별난 학구열을 불태우며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냅니다.

 

 

    외모가 쌍둥이처럼 완전히 똑같고, 그들이 공유한 지식과 사고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들의 신분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 이런 설정이 소설에서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냅니다. 게다가 어린 왕 파디샤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어린 왕이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묘한 긴장감을 만듭니다. 또한 터키에 만연한 흑사병에 대한 이야기, 새로 개발한 무기로 폴란드 원정에 오르는 이야기 등, 소설은 너무 ‘고요’하지만은 않고, 묘한 긴장감을 품은 채 흥미로운 전개를 보입니다.

 

 

    오르한 파묵의 다른 소설들처럼 『하얀 성』 역시 터키 사회와 동서양의 분리에서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외모가 완전히 닮은 두 학자의 모습을 통해 결국 동양과 서양은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터키도 혼돈의 문화 속에서 분명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암시를 보입니다. 두 학자가 서로 경쟁하듯 연구하는 모습과 번갈아가며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는 모습을 통해 서로가 무언가를 깨닫고 반성하고 용서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또한 학문에 대한 열의가 불타올랐다 가라앉는 모습에서 동서양이 서로 화합을 이루었을 때 서로의 뮤즈가 될 수 있으며 열정을 유지하고 꾸준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왜 나인가’라며 호자와 노예가 거울을 보고 대화하는 장면은, 마치 자신 앞에 놓인 거울을 보듯 굉장히 닮은 서로를 바라보는 일 자체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일일 수 있으며, 결국 본질적으론 다르지만 닮음을 인정해야 하는 터키 사회의 정체성을 찾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애매한 위치, 종교와 이념에 의한 민족의 분리, 외세에 의한 급격한 변화, 계속되는 사회의 위기. 그 안에서 진정한 터키를 찾으려는 의지가 소설에 녹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 성』은 ‘터키는 왜 터키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호자가 자정까지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나는 언제 내 나라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바보 같은 아이처럼 창 앞에 앉아 그저 공상을 하곤 했다.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호자가 아니고 나 자신이며,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상상. (51쪽)

 

 

    그날 밤을 그렇게 보냈다. 그는 병과 두려움을 나에게 전염시키려고 하면서 내가 그이며, 그가 나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희열을 느끼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혼잣말을 했다. 그는 게임을 하고 있다, 자신도 ‘게임’이라는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는 서서히 땀을 흘렸다. 더운 방에서 숨이 막히는 말들이 두려워 호흡이 곤란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에 이상이 있는 환자처럼. (109쪽)

 

 

    내 마음 속에는 아주 다른 감정이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내가 호자 그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주 꾸던 악몽처럼,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어 밖에서 보고 있었다. 나 자신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나의 정체를 뒤집어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앞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나 자신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가능한 빨리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우악스러운 병사가 온 힘으로 나를 뒤쪽으로, 군중 속으로 밀쳐 버렸다. (126쪽)

 

 

    나의 시선은 그날 아침 화가가 가져와 벽에 기대어 놓았던 나의 초상화에 머물렀다. 나는 변해 있었다. 잔치 마당에서 끝없이 음식을 먹어 대서 살이 쪘고 목살도 늘어졌다. 몸은 펑퍼짐했고 행동도 둔했다. 게다가 얼굴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 세계에서 마시고 입맞춤을 하느라 내 입술 주위는 저속함으로 물들어 이었다. 아무 때나 잠을 자고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나의 눈은 흐리멍덩해져 있었다. 인생과 세상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해하는 바보들처럼, 나의 눈빛에는 평범한 안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나의 이 모습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입을 다물었다. (158쪽)

 

 

    그러나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마음속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찾다 보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면 불행해진다고 했다. 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고, 그래서 항당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일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소러의 삶을 바꾼 그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194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