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 공지영 앤솔로지
공지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공지영 작가의 25년 문학인생에 새겨놓은 흔적의 모음입니다. 앤솔로지. 고르고 고른 그녀의 책들. 그리고 그녀가 글을 통해 말하고자했던 사고와 감정. 그것을 표현한 그녀의 단어와 문장. 그것을 다시 모아서 작고 예쁜 상자에 꾹꾹 눌러 담아 한 데 모아둔 책. 새로 구입한 예쁜 사진첩에다가 오래전 사진을 보기 좋게 정리해 꽂아놓은 책.


 

    그동안 많은 책을 발표했고,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가인 만큼 그녀의 책에서 듬성듬성하게 발췌한 글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녀의 글은 사랑, 아픔, 슬픔, 여자와 엄마, 세상, 사회, 꿈, 여러 생각과 풍경 등을 이야기합니다. 무언가 굉장히 강력한 느낌의 거친 획을 긋는 글이라 사실 한 번에 읽어 내려가기에 조금 힘이 부칩니다. 약간 어지럽고 거북한 느낌. 소화불량. 한꺼번에 많은 책들과 그 안에 담긴 생각들이 마구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 아무튼 시간적 여유를 갖고 천천히 의미를 곱씹으며 읽어야 할 책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을 읽다가, 문득 나의 생각들이 어디론가 방향을 갖고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의 종착점이 바로 ‘사랑’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종교적 차원의 사랑, 내 자식을 사랑한다는 가족적인 사랑, 이웃을 사랑하라는 인류애적인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욕망을 위한 사랑, 젊은 날의 치기어린 사랑,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에 더욱 가슴이 저려옵니다. 책을 읽다가, 이 같은 구절은 정말로 가슴에 와 닿는구나, 하고 메모해둔 것을 보면 모두가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아!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이렇게 무의식중에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며 겸연쩍게 웃곤 넘어가려한 나의 모습, 이런 발견은 조금 어색한 일이지만 신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유독 몸과 마음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아직 읽어보지 않았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가 어떤 모습을 한 책일까 무척 궁금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그녀의 사랑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사랑이라 일반적이지 않은 느낌입니다. 좋고 싫음을 떠나서 굉장히 극에 다다른 느낌입니다. 평생 그녀와 같은 사랑을 하다간 아마 자기 스스로에게 지쳐 금세 쓰러지거나 혹은 질려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아마 아직도 꿈꾸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평생을 꿈만 꾸다 살 순 없지만, 평생 꿈을 꾸며 살고 싶다, 라는 식의 말장난처럼 말입니다. 이성을 지배하는 감성으로 내 몸의 모든 감각이 향한 곳이 어딘지 알려준 책이라 고맙습니다.





 

 

    06 사랑의 포로

    사랑의 포로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만인을 위해’ 싸울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해보지 않은 사람이

    갇힌 이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을까요?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15쪽)

 

 

    34 사랑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우리는 멈추어 서서 혼란에 빠진다. 내가 더 많이 줄까 봐, 내가 더 많이 좋아하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할까 봐…….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고, 사랑한다는 것은 발가벗는 일, 무기를 내려놓는 일, 무방비로 상대에게 투항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만의 말대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지는 법”이라는 악착스러운 진리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더 많이 사랑하지도 말고, 그래서 다치지도 않고, 그래서 무사하고, 그래서 현명한 건 좋은데……. 그래서 그렇게 해서 너의 삶은 행복하고 싱싱하고 희망에 차 있는가, 하고. 그래서 그 다치지 않고 더 많이 사랑하지도 않아서 남는 시간에 너는 과연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봉순이 언니>, (47쪽)

 

 

    47 헤어진 옛사랑이 생각나거든

    헤어진 옛사랑이 생각나거든 책상에 앉아 마른 걸레로 윤이 나게 책상을 닦아내고 부치지 않아도 괜찮을 그런 편지를 쓴다면 좋겠습니다. 그때 미안했다고,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과 사랑받던 기억은 남아 있다고. 나쁜 기억과 슬픈 기억도 다 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나쁜 감정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다만 사랑했던 일과 서로를 아껴주던 시간은 그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아서 함께 바라보던 별들과, 함께 앉아 있던 벤치와, 함께 찾아갔던 산사의 새벽처럼 가끔씩 쓸쓸한 밤에는 아무도 몰래 혼자 꺼내보며 슬며시 미소 짓고 있다고, 그러니 오래오래 행복하고 평안하라고.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60쪽)

 

 

    92 상처의 이면

    아니, 아니다, 사랑은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는다. 사랑은 아이를 크게 하듯 사람을 자라게 하고 사랑만이 사람을 성숙시켜 익어가게 한다. 상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 아닌 것들로부터 온다. 그러니 상처는, 사랑이 아닌데도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들 혹은 사랑할 때 함께 올 수밖에 없는 나와 타인의 잘못들,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착한 여자>, (110쪽)

 

 

    187 사랑은 높고 고독한 독거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렵고 궁극적인 것이며 최후의 시련이요, 다른 모든 일이란 실로 그 준비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일이란 한결 높고 고독한 독거(獨居)입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213쪽)

 

 

    277 그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살고 싶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가끔 그의 손이 내가 살고 있는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면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잠들고 싶었다. 나는 그와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참견하고 싶었고 그래서 내가 그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을 하면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한 이기주의자였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311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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