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세상은 우리에게 이토록 부끄럽고 잔인한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은,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그 모양인가, 라고 지적을 하기 위한 다분히 공격적인 의도를 가진 질문입니다. 모범 답안에 가장 가까운 대답을 한다 할지라도 되돌아올 것은 분명 정신이 바짝 들게 할 따끔한 따귀뿐이란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이길 수도 없는 어떤 힘에 대한 저항, 불만과 분노, 반항, 일탈을 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출될 것입니다. 하지만 청소년기라면 누구나 짊어야 할 짐이고, 건너야할 강이기도 합니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물에 몸을 담그지 않을 수 없으니.



    이승우 작가의 소설 『생의 이면』은 박부길이라는 한 작가의 생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을 추적하는데 힘을 쏟습니다. 한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꽤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박부길이 작업한 소설에 스며든 그의 인생 조각을 하나하나 짜 맞춰 갑니다. 그리고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만듭니다. 아니, 어쩌면 미완의 그림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것이 미완의 그림일 수 있고, 부분의 그림일 수 있어도 우리는 일단 보여준 그림의 전체를 보고 나서야 그가 어떠한 모습의 인간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거의 작가의 독백, 혹은 박부길의 독백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끔 따옴표로 묶인 대화가 등장하곤 합니다. 이 대화는 아마도 말수가 거의 없는 그가 실제로 가끔씩 내뱉었던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그가 뱉어낸 얼마 되지 않는 말만 봐선 그의 인성과 성격, 사상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없어서 오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가 했던 말의 의미, 그리고 그가 보인 행동의 의도에 대하여 따로 정리해 보인 그의 독백을 듣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의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만큼 원채 말이 없고 무뚝뚝한 행동을 보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어쩌면 이것은 젊은 시절 우리를 쉽게 판단하려한, 자신 이외의 세상 모든 것들이 저지른 성급한 일반화, 혹은 규격화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젊은 시절의 이유 없는 반항에 대한 이유에 대해 그럴싸한 의미를 담아 말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못한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 사라지진 않을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나오기까지 내면을 장악했던 나름의 사고, 자신이 처한 환경 등등의 여러 요인을 들어가며 어쩔 수 없었다는 독백이 오히려 너저분하게 보일 것입니다. 소설의 느낌이 그랬단 것이 아니라, 소설 안에서 보인 인물이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인생을 정리하는 행위는 현재의 자신을 감싸기 위한 변명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소설은 그런 행위가 부끄럽단 것을 알고 있긴 한지, 누군가의 생을 누군가가 대신 정리한다는 형태를 취합니다. 타인의 생에 대한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곧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일 것입니다. 무언가 대단히 부끄러워 말하지 못할 젊은 날의 기억들에 대해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하게 내뱉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작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작가가 쓴 여러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형태의 글로써 말입니다. 당연히 소설의 내용이 소설가 본인의 이야기일리 없습니다만, 어쩌면 이건 작가 스스로의 생을 이야기한 것일지 모릅니다. 누군가의 생에 대한 이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한 내면. 그리고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의 생에 대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부끄럽고 나약하고 떠올리기 싫은,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자서전적 풀어쓴 변명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 박부길의 연보를 정리하다 말고 미완의 느낌으로 끝납니다. 아직 그의 생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에 행복해 죽겠다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억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23쪽)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나는 가장 서툴다. 서툰 것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상처를 입는다. 궁색한 선택이지만, 그래서 유일한 나의 대안은 사람 곁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참혹하고 질긴 생래적인 외로움은 어쩔 것인가. 하여 나는 나의 물색없는 외로움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107쪽)

 


    그러나 그런 유의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는 것은 온당하지 않음을 나는 안다. 옛날에 나는…… 어쩌고 하는 투의 자기과시를 곁들인 감상적인 회상이, 회상하는 개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무슨 의미를 주겠는가. 모든 과거는 기억된 과거일 분이며, 모든 기억은 검열된, 또는 취사선택된 기억일 뿐이다. (113쪽)

 


    나는 그때 너무 커버렸던가. 적어도 생각은 그렇게 했었다. 어쩌면 생각뿐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고, 그래서 늘 행복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은 것은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욕망이 많은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생각은 생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결핍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세상의 불화감은 더욱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또 더 복잡한 생각의 밑천이 된다. 끝도 없는 악순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돌림의 대상이 된,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수하듯 세상을 따돌릴 채비를 한다. 거기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자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돌출한다. (116쪽)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191쪽)

 


    그는 오히려 더 깊이 동굴을 판다. 그리고 그 동굴에 오만가지 책들을 숨겨 놓고 탐욕스럽게 읽어 댄다. (236족)

 


    그리고 또 중얼거렸다. 그녀는 어디 있는가. 왜 여기 없는가. (24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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