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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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물론 많은 차이점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 문학의 차이점을 나열해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 나온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 두 문학의 테두리에 동시에 포함되어 교집합의 위치에 있을 소설도 분명 존재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순문학을 지향한 장르문학, 장르문학을 지향한 순문학. 어느 것이 되어도 좋습니다. 그저 그런 소설이 있다면 과연 어떤 느낌의 소설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일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것도 1950년대의 일본 사람. 묘하게 그 시대 일본의 분위기, 시대가 갖는 습관, 사람들의 사고방식 등이 제 안으로 스며듭니다. 아직 가본 적 없는 곳이라 일본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세이초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 당시의 일본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듭니다. 당시 일본 길거리의 불빛을 알고, 술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셔봤고, 사람들을 만나며, 전화를 걸고, 전보를 치고, 약속 장소를 확인하며 기차 시간표를 들추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제가 전혀 겪어보지 않았던 착각의 기억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점과 선』도 그런 착각을 만들어내는 추리소설입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떤 한 지점에 가만히 서서 현재까지 소설이 인도한 지점들을 연결해보곤 합니다. 그리고 점과 점을 연결하여 하나의 선으로 만들면서 마치 자신이 어떤 사건을 쫓는 형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왜 이것은 아닐까? 이 알리바이에는 어떤 트릭이 감춰져 있을까? 왜 그들은 그래야만 했을까?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소설을 통해 확인하며 직접 선을 그어 보게 합니다. 소설 밖에 있지만, 소설 안에 있는 듯한 착각.

 


    그런 착각은 세이초 소설이 보인 친절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독자 스스로가 사건의 중심에서 능동적으로 사건에 임하도록 친절한 유도를 보입니다. 간간히 등장인물에게 일어났던 일, 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 등을 정리해줍니다. 그리고 사건을 추적하는 인물이 이 같은 정보를 마음속으로 정리하는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며 독자도 함께 고민해보길 권합니다. 독자와 비슷한 높이에서 독자와 함께 풀어보길 원하는 미스터리. 세이초의 인간미가 돋보인 서술 형태란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시종일관 담백한 어조로 차분히 사건을 말합니다. 조금 건조한 느낌의 해설과 인물들 간의 대화로 소설은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듯하는데, 저는 이런 느낌이 좋았습니다. 소설이 보인 사건 자체는 정말로 단순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단서를 쫓는 과정도 약간 낡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진행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잠깐씩 숨을 돌리게 한 정적인 순간들이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또 그런 장면이, 듬성듬성 들어간 삽화와 잘 어우러져 더욱 분위기 있는 추리소설을 만든듯 합니다.


 




 

    그들에게 마지막 기쁨의 시간조차 충분히 갖지 못할 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42쪽)

 


    찻집 안에는 단골손님의 얼굴이 두셋 보였다. 종업원이나 손님 모두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창문 너머 보이는 긴자는 여전히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라하만 며칠간 그곳에서 일탈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미하라의 그 뻥 뚫린 시간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떤 이상한 것을 보고 왔든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들이다. 당연한 일이건만, 그는 일종의 고독을 느꼈다. (89쪽)

 


    4분간의 공백은 정말 기막힌 착상이야. (126쪽)

 


    내가 이렇게 병상에 낮아 나의 여윈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전국의 여러 지방에는 일제히 기차가 정차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인생에 따라 기차에 타거나 혹은 내린다.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정경을 상상한다. 그러다 보면, 그 시간에 각 선의 어느 역에서 기차들이 교차하는지까지도 발견한다. 무척 즐겁다. 기차가 교차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필연이지만, 타고 있는 사람들이 공간적으로 교차하는 것은 우연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여러 고장에서 펼쳐지는 스쳐 지나가는 인생을 한없이 공상할 수 있다. 타인의 상상력이 만든 소설보다도 자신의 공상이 훨씬 흥미롭다. 꿈이 떠다니는, 고독한 즐거움이다. (137쪽)

 


    말할 것도 없지만, 수사관에게 중요한 것은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노력입니다. (190쪽)

 


    누구나 모르는 사이에 선입관이 작용해서, 당연하다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이 만성이 된 상식이 간혹 맹점을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222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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