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러리엄
로렌 올리버 지음, 조우형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나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을 만큼 너를 깊고 넓고 높이 사랑해." 사랑하는 그대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습니다. 저보다 훨씬 이전에 아주 오래 전의 누군가가 그의 시에서 이 문장을 먼저 사용했을테지만, 그건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토록 아름다운 표현들보다 더 아름답고 진실된 제 마음을 앞서 말한 시 한 구절을 인용해가면서까지 어떻게라도 그대에게 잘 전달할 수만 있다면 하고 바란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옛 시를 빌려서라도 그대를 향한 제 작은 몸부림을 고스라니 전달할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고, 그것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그 순간 이후의 세상은 그대와 나, 둘뿐이고, 나머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니까 다른 것에 대해선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렌 올리버『딜러리엄』은 디스토피아적 근미래 세상을 그려놓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디스토피아적 세상은 감정이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분노와 질투, 복수에서 비롯된 파괴적 감정은 세상을 아프게 했던 전쟁의 씨앗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인간의 감정을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하며 치료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며 18세가 되면 검사를 통해 아이들을 감별하고 치료를 거친 후 세상의 구성원으로 살 수 있게 재조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완벽한 행복이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을 말하며, 치료라는 것은 감정을 감지하는 뇌의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말합니다.



    가끔은 이런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의 세상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설마하니 세상이 그렇게까지 되도록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말이 안되는 소설의 설정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소설이 갖고 있는 치밀함에 놀라곤 합니다. 피어나는 새싹들에서 온기를 느끼고,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에 몸을 내맡겨보기도 하며,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낭만주의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생활에 찌든 무미건조한 표정을 한 채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세상의 밝은 면보단 어두운 면에 익숙해져 있고, 거대한 세상안에서 무력감을 느끼며, 스스로는 안될 것이라고 체념하며 자신을 닫아 버리곤 합니다. 소설에서 말하는 자연 치유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행하는 이런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니 스스로 감정을 밀어내고, 건조한 일상을 행복이라고 단정하며, 세월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오로지 너 하나밖에 없다.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나는 너와 결혼할 것이고, 천년 만년 살더라도 나는 너와 또 다른 평생을 살아 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남녀가 이 세상에 많이 있다면 정말로 다행일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구구절절한 사랑을 노래했지만 세월이 흘러 그시절의 마음이 식어버리는 경우의 남녀도 많을 것입니다. 또한 혼기를 놓치고 시간이 많이 흘러버려서 운명인지 무언인지 모를 그런 힘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남녀도 있을 것입니다. 또 상대방에 대한 특정한 목적을 갖고 결혼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목적을 상대방에게서 구할 수 없게 되자 사랑도 함께 식어버린 남녀 역시 존재할 것입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이것이 사랑인지 생활인지 모르겠다고 여기는 남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남녀들은 서로를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놈의 정 때문에'라는 핑계로 시간을 죽이고 있진 않은가, 그리고 혹시라도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며, 그런 것에 대한 고민과 생각마저 하지 않은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여러분께 하고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소설『딜러리엄』이 제게 했던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제가 말한 내용들을 소설이 겉으로 뻔히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이런 것은 아닐까 하며 저 혼자만 그렇게 느꼈고 혼자서 상상한 내용일지 모릅니다. 아무튼 소설은 굉장히 낭만적인 비극을 보이고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이고, 오! 로미오, 내 사랑 줄리엣!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가 생긴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아나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장르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가끔은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소설은 분명히 멋지고 괜찮았는데 영화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린 남녀의 사랑을 영화에서 어설프게 그려놓고, 세세한 감정을 잘 잡아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개연성을 찾기 힘든 것이기도 할 뿐더러 십대의 감성은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잘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딜러리엄』에서 표현하는 사랑의 감정은 꽤 진지한 설명과 충분히 납득할만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에 쥐어진 땀의 느낌부터 미묘하게 떨리는 입술과 속눈썹, 그리고 가슴 속에 응어리진 아픔까지 느껴졌다면 이 소설이 그런 감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에 대한 제대로된 설명이 되진 못하겠지만, 아무튼 저는 그런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감정이란 것은 텍스트로 설명하기 힘든 것일 뿐만아니라 텍스트가 아니면 또 설명하기 힘들어 보이기도 한 것이기에, 어설픈 연기력으로 텍스트적 사랑을 표현하려 한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더더욱 어린 배우가 그것을 소화하려 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꽤 많은 영화들이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소설의 영화화가 그렇게 반갑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이 만약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눈에 보이는 위기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비슷한 장르의 다른 소설들의 세상은 사람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며 말 그대로 정말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해야하는 암울한 세상인데 반해, 『딜러리엄』이 보여주는 세상은 비교적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진 않기 때문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더군다나 사랑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오히려 아픔이 있어 아름답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낭만주의자가 아니라면 이런 식의 사랑 놀이가 하찮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남녀와 그 둘만의 세상에선 그들을 갈라놓으려는 모든 장애물들이 그 무엇보다도 잔인한 적들이고, 사랑이 아니라면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으로 이보다 더한 위기는 없다고 말할 것이지만 말입니다. 반면 어떤이들은 아마도 이들의 갈등을 그저 젊은 시절, 2층 창문 너머에 있을 순이를 그리워하며 순이의 방에 몰래 드나들수 있게 했던 창문 옆의 커다란 나무가 잘려버린 정도의 위기라 볼 수 있겠고, 물래방앗간에서 철수와 몰래 만날 약속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아버지로부터 외출금지령을 선고받은 정도의 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딜러리엄』은 저같은 낭만주의자들이 재미있게 볼 소설이며 그들의 감성을 충분히 자극할 장르소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아!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이여. 그것은 너무나 멀리서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로 내려다보고 있기에 더욱 저를 슬픔에 빠져들게 합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랑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결국 사랑이 사람들을 죽게 한다는 점이다. (9쪽)



    사람들은 자주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는 거의 생물학적인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게 만드는 호르몬이나 화학적 불균형이 남자애를 여자애에게 여자애를 남자애에게 이끌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충동도 물론 치료에 의해 해결 된다. (59쪽)



    가끔 나는 사물을 가만히 바라보며 세상이 내 눈앞에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펼쳐져 있도록 받아들일 때, 한순간 시간이 멈추고 세상이 그 각도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다면 영원히 살 수도 있는 거다. (168쪽)



    사진, 아니 영화같은 장면들이 이어졌다. 이건 영화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선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 같았다. (237쪽)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생각을 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내 안에서 태풍처럼, 허리케인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그 단어가 마침내 내 안에 가득 차올라 혀를 차고 입 밖으로 탈출하려 하는 것을 나는 두 입술을 꼭 붙인채 막아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아직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말해보지 않은, 심지어 마음속으로 혼자서 생각해 보지도 않은 그 단어. (324쪽)



    사랑. 단 한 마디의 단어. 속삭임을 닮은 소리이자 칼날보다 크지도 길지도 않은 그 단어. 바로 그것이었다. 단검 속은 면도칼. 그렇게 삶의 중앙을 갈라 버리고 모든것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이전과 이후. 세상의 반대쪽은 영원히 다른 쪽으로 그렇게 떨어져 나간다.

    이전과 이후……, 그리고 그 사랑이 지속되는 그 동안.. 칼날보다 크지도 길지도 않은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 (329쪽)



    사랑.

    끝없이 반복되는, 방의 구석까지 빠짐없이 조각해 넣은 글씨는 우아한 필기체와 딱딱한 활자체가 섞여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긁히고 상처 나고 구멍이 난 벽이 판 편의 시로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404쪽)



    사랑, 치명적인 것들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 사랑은 당신이 사랑을 소유할 때도, 그렇지 못할 때도 당신을 죽게 한다.

    하지만 엄밀히 그건 맞는 말이 아니었다.

    사랑은 형을 선고하는 자인 동시에 형을 선고 받는 자였다. 사형집행인. 칼날. 마지막 순간의 구원. 헐떡이는 호흡과 머리 위를 빙빙 돌아가는 하늘.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게 하는 기도.

    사랑, 그것은 당신을 죽게 하고 또 동시에 살게 한다. (436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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