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의 시 민음 경장편 5
김사과 지음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저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글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할 순 없을까. 그림으로 글을 쓰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드니, 그럼 글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 부끄럽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 생각만해도 가슴 설레이고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문학시간 글쓰기 숙제로 하나의 그림을 글로 그려서 제출했던 적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담아내려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굉장히 난해한 글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짦은 문장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 비슷한 형태를 취해서 산문도 아니고 시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의 글. 그리고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 수 없는 함축적인 의미를 가득 담아,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색깔을 입히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명암과 인물들의 상징적인 행위에 대한 농과 담의 조절까지. 스스로는 꽤 만족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법한 괜찮은 그림을 글로 그려서 선생님께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한테 혼났습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사고, 그리고 걸러내는 과정 하나 없이 내면에 흐르고 있는 의식을 그대로 뱉어내고 있는 잔인한 글, 혹은 시. 김사과 님의 <테러의 시>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허용하는 통속적인 이념과 도덕성을 거부하고,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의 틀까지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난해합니다. 그러니까 '나쁘다, 싫다, 별로다.' 뭐 이런 느낌이 아니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예술은 아무나 하는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편으로는 감사과 님의 '아니오'라는 태도가 <테러의 시>에 접근하려는 보통 사람들을 '아니오'라고 거부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뭐랄까, 그러니까 결국 저는 모르겠단 겁니다.



    <테러의 시>는 혼란과 타락이 가득한 도시, 서울에서 조선족 아가씨 제니와 영국인 불법체류자 리가 만나 개처럼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개처럼'이라는 표현은 정말 그렇긴한데, 그렇다고 그들을 보고 연민의 감정이 생기거나 하진 않습니다. 저는 그들의 눈으로 보았던 폭력을 경험해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한 보통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은 '이곳'에서 이방인이 되어 이방인의 눈을 하고 우리의 현실을 드려다보고 있는 것이지만, 저 스스로는 절대로 '이곳'에서 이방인일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그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감정일 수 있겠다 싶은 것입니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제가 오히려 이방인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회피해 버리고 마려는 생각이 어쩌면 나는 가해자라는 생각 때문에 생긴 죄책감에 기인해서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도망치려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간에 저는 이 소설을 보고 여러가지 이유로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소설이 나를 거부했구나, 혹은 나는 이 소설로부터 거부당해버렸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느낌은, 역시 학교다닐 때 바로 그 문학시간, 이상 님의 시나 글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상 님의 작품을 보고 저는 난해하고 어렵지만, 이 글을 보고 나는 무엇인가를 느껴야하는가, 혹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여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들의 무리에 나도 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소망이 생겨났고, 누군가로부터 나 자신은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인정받거나 위안받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투명한 유리지붕 너머의 세상과 공기를 나도 한번 느껴봤으면 싶었습니다. 김사과 님의 <테러의 시>를 보고 문득 그때의 그런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남들은 어떻게 볼 지 몰라도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글은 무척 닮아 보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글'이란 느낌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과 무척 닮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알고 있는 대상들을 비틀어 놓거나 특정 부분만 강조해 놓으면서 무언가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달하려고 하는 모습. 그런데 초현실주의 그림들이 대개 그렇듯, 이게 뭔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외롭고 우울하고 고립된 감정이 생겨납니다. 이 소설로 인해 내가 이방인이 된 듯하고, 이 동네가 너무 낯설어서 나는 도대체 어디에 발을 딛이고 서 있어야 하는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모르겠다'였나 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동네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습니다. 어딘가 나와 닮은 구석도 느껴지고,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불쑥 생겨납니다. 김사과 님의 다른 글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까지 말입니다.







 


    제니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그곳에서 제니가 조선족 창녀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생의 말에 따르면 창녀는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여자다. 그런데 제니는 돈을 받고 섹스를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제니는 창녀가 아니다. 하지만 대학생의 말에 따르면 제니는 창녀가 맞다. 아니 여자들이란 다 창녀다. 왜냐하면 돈을 받지 않고 남자와 섹스하는 여자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니는 돈을 받지 않고 섹스한다. 그러니 제니와 자는 남자들은 창녀와 섹스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제니와 섹스한다. (39쪽)



    하지만 중국 사람 아니야. 한국 사람도 아니야. 재준이 말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야. 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조선족이야. 조선족이라고! (88쪽)



    언제나처럼 환각인지 현실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환각은 항상 현실보다 살아 있고, 현실은 항상 앞뒤가 맞지 않으니까. (146쪽)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돼지와 함께 돼지처럼 길렀죠. 맞아요,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어요. 동물로 키워진 적이 있는 인간들은 서로를 알아보죠. 아무리 감추려 해도, 상류층의 악센트와 비싼 옷을 감추어도, 우리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어요. (167쪽)



    동물로 키워진 인간들의 특징은 특징이 없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 인간성이 없는 거예요. 당연하죠,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여전히. 우리는 인간이 뭔지 몰라요. 물론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이죠. 하지만 아니에요. 뭔가 빠져 있어요.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인간으로 길러졌다고 모두가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168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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