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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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있었던 일인데'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일단 무섭기부터 합니다. 옛날에, 그것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데, 이제와서 이야기의 진위를 증명할 길이 없으니, 이거 참,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습니다. 이렇게 믿거나말거나 식의 괴담들은 무섭기도 하고, 때론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자다가 가위 눌렸던 경험담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등줄기가 오싹해지고 식은 땀이 흐를 것 같습니다. 이야기로 그냥 흘겨듣지 않고, 이야기 속의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감촉, 짓누르고 있는 공기의 냄새, 차라리 보고 싶지 않다고 두눈을 질근 감아보지만 눈이 감기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가 눈꺼풀을 더 커지게 열어젖히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공포에 질려 못 볼 것을 보고야 만 듯한 표정의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물론 소설 <괴이>가 그런 식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소설 속의 이야기들을 그냥 그렇다더라 하는 마음으로 놓아버려야 하니 괜히 불편해지고 괴이한 기분에 빠져듭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 시리즈 중의 하나, <괴이>는 괴이한 이야기들을 모아둔 단편집입니다. 저는 단편 모음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볍게 읽기에는 나쁘지 않다만 '집集', 그러니까 단지 모아놓고 그칠 것이 아니라, 모아놓은 이유가 분명하게 보여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단편집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작가가 단편집을 쓸 생각을 갖고 써내려갔던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출판사와 편집자가 어쩔 수 없이 모아 묶어 둔 단편집들은, 짧은 글들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기가 힘들었고, 오히려 따로 보면 좋았을 글들이 서로를 방해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물 단편집 <괴이>는 다릅니다. 짧은 이야기들을 묶어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려 했던 분명한 의도가 보이는 글입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작가가 단편의 이야기들을 묶어 놓을 생각을 하며 썼던 글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묶여 있는 짧은 글들이 공통적으로 일본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점은 당연한 것이고, 그외에 이 시대 소시민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했던 뚜렷한 목적 의식까지 보입니다. 또 매번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고용살이꾼'이라는 공통된 소재로 비슷한 직업을 가진 계층의 이야기를 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단편에 나오는 인물들이 조금씩 겹치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저는 매우 놀랬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구전되어 왔을 법한 옛날 이야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래되는 과정에서 각 지명과 이름들이 조금씩 바뀌며 전해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이야기가 낡고 닳아가는 과정까지도 귀신에 홀린듯 묘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어 원문으로 봤으면 또 그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무척 궁금합니다. 분명히 단편들마다 등장했던 인물들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재등장 하고 있는데, 이게 참 말로 정확하게 어떻다라고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편<바지락 무덤>에서 바로 그런 묘한 느낌이 드는 이유를 살짝 알려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거 참 정말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맞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미야베 미유키가 의도했던 것인지가 굉장히 궁금해졌습니다. 참으로 희괴한 일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괴이>는 절대로 무섭거나 징그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담담하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조곤조곤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유명한 범죄소설들에서 볼 수 있었던 흔히 알려진 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깔끔하기도 하고 담백하기도 합니다. 따뜻한 화로 옆에 앉아 탁탁 튀겨가는 숯을 바라보며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소곤거리며 조심스레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같은 느낌입니다. 대단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또 이것대로의 매력이 있습니다. 일본 대표 여류작가인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와는 또 다른 느낌과 형태의 감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멋진 문장, 가슴에 와닿는 문장, 밑줄을 그어야 할 것만 같고 가슴에 새겨 들어야 할 것만 같은 문장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담아놓은 예쁜 그릇 위의 밑반찬 같은 이야기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또 그런 느낌이 꽤나 좋았습니다.



    한편 이 이야기들의 출처가 무척 궁금합니다. 단지 그녀 머리 속의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라면 미야베 월드는 무진장 넓은 곳이구나를 느낍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고 큰 위기나 갈등의 구조도 없는 단순한 형태의 글이지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역시 대단합니다. 특히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올 때 마다 자연히 귀를 쫑긋 세우고 귀기울이게 만드는 흡인력은, 독자가 느낄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웅크리고 숨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밤, 초상집을 찾았다가 그 집 귀신이 내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라 들러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 속의 길을 비틀비틀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결국 집 안으로 귀신을 달고온 꼴이 되어버린 모양처럼 말입니다.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맛이 있습니다. 가랑비에 옷이 흠뻑 젖어 버린 줄도 모를 정도로 빠져들게 만드는, 괴상하고 이상한 힘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아주머니네 고향의 산신님을 모신 신사에는 특이한 전설이 있었대. 그건 말이지, 신점 제비에서 흉을 뽑게 되면 신사 뒤에 있는 매화나무로 가서 신점 제비를 가지에 매달면서 이렇게 비는 거야―이 흉운을 저 대신 누구누구에게 붙여 주세요, 하고. (122쪽)



    그 '도깨비'는 당신들이 토해 낸 더러움을 전부 빨아들이고 짊어져 주고 있는데,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고 멀리 하려고만 해요. 당신들은 그렇게 깨끗한가요? 당신들은 그렇게 옳은가요? (170쪽)



    네가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마 내가 쓸쓸하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나는 네 얼굴에 내 마음이 비칠 때까지 내가 쓸쓸하다는 것조차 전혀 깨닫지 못했어. (171쪽)



    당연하다. 하지만 안 되었다. 무언가―다로의 마음 깊은 곳에 가만히 숨어 있던 무언가가, 목소리르 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나쁜 일, 위험한 일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충고를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몸 안족에서 치밀어올라, 양팔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래서 다로는 입을 다물고 다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188쪽)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친절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죽일 수 있는 놈들이 있어요. 그런 놈들은 어느 모로 보나 인간 같은 멀쩡한 얼굴 밑에 귀신의 본성을 숨기고 있지요. (235쪽)



    으스스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끝이 흐지부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깨비가 쫓아와서 소동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도깨비의 정체를 나중에 알게 된 것도 아니다. 맥락이 없다. (239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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