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성술 살인사건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81년,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가 타계하자 신본격의 시작을 알리는 대단한 작품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본격의 끝과 시작이 묘하게 맞물리는 이 일을 두고 세간에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부활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었다고 합니다. 그때 혜성같이 화려하게 등장한 소설이 바로 시마다 소지<점성술 살인사건>입니다. 아니, 시작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군요. 에도가와 란포상 본심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으니 말이에요. 그런데 출간된 이후, 추리소설 팬들을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면서 차차 화려함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차츰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소설을 읽어본 제가 지금부터 이 소설에 대한 입소문의 듣지 못했던 분들에게 소문을 퍼트리려고 하고 있으니 신기할 노릇입니다. 아니! 이 소설이 데뷔작이었다니, 대단합니다.



 





    데뷔작이었던 만큼 엉성한 부분들이 보입니다. 쓴소리부터 하자면,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한층 고조시켜 놓은 긴장감을 소설이 끝날 때 까지 유지시키지 못했던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건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구성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요, 신인의 패기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소설 하나에 모두 담아놓으려는 무리수를 두다보니 소설 중반에 독자를 맥빠지게 만드는 전개가 이어졌고, 그래서 이야기가 난잡해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소설의 첫 장부터 독자에게 최고조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작 부분에서 보여준 화려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것이 아마도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숙제였을 텐데,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내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는데도 역시 이 소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책 속의 책'의 이야기가 주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점성술과 살인이라는 소재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 속의 책'이라는 모양에서 오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환상적이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어찌보면 이런 모습의 소설이 시마다 소지의 주특기 혹은 필살기같은 한방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소설 모두 옛날 옛적에 하면서 공소시효가 지나도 훨씬 지난 옛 사건을 파헤치는 사건 풀이를 다루고 있으니 묘하게 닮은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현미경 단위까지도 수사 대상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범죄자에게 꿈이 없는 시대라고. (486쪽)



    한편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홈즈 역을 맡은 미타라이 기요시와 왓슨 역을 맡은 이시오카 가즈미, 저는 이 두 인물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들이 쇼파에 앉아서 '그건 이래서 아니고, 그러니 일단 제외시키고'하는 식의 일장 연설 추리대화들이 마치 독자도 함께 참여해서 같이 추리를 해나가나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 독자도 동참할 수 있는 모습이라 무척 좋았습니다. 하지만 홈즈의 폭풍과 같은 풀이를 듣는 것처럼 미타라이의 풀이가 정신 없이 휘몰아칠 때가 간혹 있는데, 그럴 때는 속도에 맞게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점성술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의 폭풍과 같은 추리 연설, 그리고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의 침울해하는 표정과 변덕에서 오는 기이한 행동들이 은근히 매력적입니다. 또 그런 변덕을 받아주며 스스로 왓슨 역을 자청한 이시오카의 소극이면서도 진지한 나름의 단서수집과 추리도 재미있었습니다.


 

    헛수고야, 헛수고라고. 그대로야. 모든 것이 이전에 상실돼 있어. 내가 하려는 것 따위는 헛수고지. 사소한 기쁜이나 슬픔이나 분노, 그런 것은 태풍이나 소나기, 봄이 되면 매년 어김없이 피는 벚꽃 같은 거야. 인간은 그런 것에 매일 좌지우지되면서 결국 모두 비슷한 곳으로 흘러가. 아무도, 아무것도 되지 못해. (177쪽)


    그래서 나는 더러운 쓰레기 더미처럼 보이는 이 도시가 실은 여러가지로 억압된 비명이 가득 찬 소굴인 것을 알았지. 그때마다 항상 생각했어, 듣는 것은 이제 충분하다고. 그런 시대는 오늘로써 단호히 끝내자. 이제 슬슬 누군가를 구해줘도 될 때야. (250쪽)

 


    사실 사회파니 본격이니 하는 구분도 무의미한 편가르기일 뿐이지만, 신본격의 시작이라고 하는 시마다 소지의 소설에도 사회파의 느낌이 제법 많이 납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에서는 고정관념과 피해의식에서 기인한 홈즈와 왓슨 파헤치기가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영국의 기만적인 외교활동에 까지 연결되면서, 오호 이 이야기기가 이렇게도 흘러가는구나 싶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홈즈와 왓슨을 싫어하는 듯한 삐딱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면서 묘하게도 미타라이와 이시오카가 그들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그점이 재미있기도 합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건 간단해. 뭐든 비판은 쉽고 창조는 어려워. (256쪽)



    추리의 문제는 총 세가지가 등장합니다. 각각의 사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부터 방법과 이유까지, 40년간 일본에서 홈즈역을 자청한 추리꾼들이 모여 의논해보고 탐구해보아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던 한 괴상한 사건을 들춰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추리가 어찌보면 쉽고, 어찌보면 어려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년탐정 김전일>을 봤던 독자라면 쉽게 눈치 챌 수도 있는 트릭이 주요 트릭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필 제가 기억하고 있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유일한 에피소드가 바로 이 트릭의 이야기여서 소설을 읽자마자 김이 새버렸습니다.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는 이 소설의 트릭을 도용한 것에 대해 얼마 전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최근 개정된 책부터 <점성술 살인사건>의 트릭을 차용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고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렇지만 트릭의 해법을 미리 알고 있더라도 <점성술 살인사건>을 괜찮게 읽었기 때문에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시마다 소지처럼 말이지요.



    이야기의 거의 막바지에 이르면 시미다 소지가 직접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장이 등장합니다. 풀이가 나오기 전에 독자 스스로가 한번 추리해보라는 거만하고 얄미운 메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힌트와 증거는 모두 주어졌으니 논리와 추리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한번 승부해보자는 패기가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도전장을 내밀기 전에 답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정적인 힌트를 보여주고 있긴 합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그 힌트를 보기 전에 트릭을 풀이해내야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지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신가요.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누군가가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246쪽)



    아무튼 신본격의 시작을 알리는 대단한 작품으로 이 소설은 일본 추리소설사에서 큰 역사적이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데뷔작이라고 하나 여느 다른 작가의 데뷔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점성술 살인사건>, 추리소설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할 필독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퍼즐을 좋아하고 수수께끼를 좋아하며 이상하고 요상한 것에 잘 이끌리는 분들에게 심심풀이 땅콩과 같은 유익한 소설이 될 것란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 그런데 이 소설이 정말로 데뷔작이란 말인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단합니다. 시마다 소지 님,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아조트는 왜 만들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내가 서양화를 그리는 것과 같은 한 개인의 변덕스러운 창작 행위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미의식에 이르는 극한이며 무한대의 동경이지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아조트는 그러한 사정과는 별개로 우리 대일본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만들어야 한다. 일본 제국은 잘못된 길을 걸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그 부자연스러운 흔적은 역사 연표의 도처에서 찾아낼 수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전에 없는 커다란 변화를 체험하려 하고 있다. 이천 년에 이르는 잘못의 대가를 지금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망국의 위기가 눈앞에 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구할 존재가 바로 아조트이다.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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