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야마구치 마사야<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을 읽어 보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워킹데드>라는, 개인적으로 매우 재미있게 본 미드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소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이 저런식의 좀비들이 대거 등장하는 호러물은 아니구요, 일본 작가가 쓴 일본 추리 소설입니다. 1998'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과거 10년간 베스트20 2위1998~2008년 베스트 오브 베스트 2위에 빛나는 타이틀을 거머쥘만큼 대단한 작품이군요. 지금까지 읽어왔던 일본 추리 소설과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거든요. 담배냄새 쩌러서 "어이~ 어이~"거리는 형사가 등장하는 일본 특유의 하드보일드물도 아니거니와 담백하고 간결한 느낌의 명탐정류 추리소설도 아닙니다. 배경자체가 미국, 뉴잉글랜드의 툼스빌이라는 곳이며, 등장인물 중에서 완전한(?) 일본 사람은 단 한명 등장할 정도이니, 일본스럽지만 일본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보이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살아있는 시체, 즉 좀비를 이야기하고 있다니, 이런 소재로 추리소설을 만든다는 것 자체로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시체가 줄줄이 되살아나는 이 이상한 상황 속에서, 어째서 범인은 살인이라는 부질없는 짓을 했을까? 우리는 이 점을 먼저 고려해야  했습니다.

 

    시체들이 줄줄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전혀 공포스럽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귀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살인 사건이 생긴 범죄 현장에 형사들이 도착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죽어서 시체가 되어있던 피해자가 살아나고, 형사에게 자신이 어떻게 죽은 것 같다며 설명한 뒤, 시체는 절규하며 건물을 뛰쳐나갑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장면입니까. 이런 판국에 추리는 무슨 놈의 추리란 말입니까. 그리고 살인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짓입니까. 


 

텔레비전에서 매일매일 다른 대량 소비재와 똑같은 선반에 진열한 허구화된 죽음을 보여준다면 반대로 감성이 에민한 사람은 방어 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즉 그들은 마비되고 마는게야. 그렇게 현대인들은 매일같이 죽음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게 되지.

 

 

책에서 보여주는 죽음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과 다른, 영혼의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살인자가 품고 있는 살인의 의도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체들이 되살아나는 상황 속에서 진정한 살인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니 "아, 이 책은 추리 소설이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말한 '살아있는 시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는 여러 단계들이 있어서 명확하게 경계선을 긋기가 어려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상적인 것이지....

죽음이란 그런 식으로 애매하고 유동적인 것이지. 산 자들이 자기 편의대로 단정짓는 경우도 있어. 어느 이름 높은 과학자가 말했듯이 그것은 마음의 문제일지도 모르겠구나. 로미오의 마음속에서 줄리엣이 죽은 순간이, 생물학적으로야 어떻든 줄리엣이 죽은 순간이지. 

 

    이런식의 구체적인 조사와 해박한 지식이 난무하는 소설은 다카노 가즈아키<13계단>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록, 철학적인 성찰과 미국식 장례 풍습과 장례 기술, 공동묘지 산업 등,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로 인해 이 소설을 쓰기위해 작가 야마구치 마사야가 죽음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이 너무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종일관 썩소를 자아나게 했던 냉소적인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쉴새없이 이어지는 슬랩스틱 코미디 때문에 으스스한 공동묘지가 배경이었지만 오히려 재미있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점은 가이도 다케루<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과 많이 닮았습니다. 도입부에 이어지는 대가족의 가계도에 대한 설명과 등장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장면은 리 퀸의 작품을 보는 듯했고, 완벽히 논리적인 추리의 트릭은 존 딕슨카의 작품을 보는 듯했습니다. 오랜만에 "대단한" 추리 소설을 읽었습니다.


 

신은 없다.

시체 부활은 누구의 뜻도 아닌 단순한 현상 아닌가.

시체 부활뿐만 아니라 인간의 통상적인 삶이나 죽음 역시 거기서 완벽한 이유나 의미, 누군가의 뜻을 발견할 수는 없지 않은가.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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