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을 향해 쏴라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69)는 1890년대 미국 서부에서 실제로 있었던 두 강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은행털이범들의 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강도의 편에서 함께 울고 웃기를 반복합니다. 재기넘치는 말재주와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탈출하는 유머스런 장면에서는 유쾌한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고, 총을 쏴가며 말을 타고 도망가는 장면에서는 스릴넘치는 액션 영화이기도 하며, 한 여인과의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통해 로맨스 영화가 되기도 합니다. '참 좋을 때였지'라는 뜬금없는 로망같은 것이 느껴지는 서부 영화입니다. 뚜렷한 대상이 없지만 그저 그리운 마음이 생기는 그런 영화 말입니다. <밀실을 향해 쏴라>는 이 영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영화와 비슷한 이름의 제목을 보자마자 밀실에 대한 뜬금없는 로망이 느껴졌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무척 대단한 작명 센스를 발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밀실'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한 편의 영화같은 모험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소설은 고유한 스타일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작풍에 붙여놓은 '유머 본격 미스터리'라는 이름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격도 본격이지만 유머라는 부분을 고딕체로 강조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시덕거리는 개그, 그리고 썰렁하지만 피식 웃게 만드는 개그를 좋아하는 저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배를 잡고 동동 구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책을 보며 배시시 쪼개는 저를 보고 옆사람이 뭐가 그리 재미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면 이해가 빠른 적절한 설명이 될까요. 아님 말구요, 책을 직접 사서봐야 알지, 설마 이 글만 찍 읽고, 나는 책 한 권을 다봤다고 여기며 배불러 할 생각들인 것은 아니겠지요, 라고 말하는 이런 식의 개그와 재미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명탐정'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명탐정의 제자'라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아무래도 지금은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라도 이 세상에 명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게 '명탐정의 제자'인 자신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5쪽)



    전편인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와 연작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앞의 이야기를 모르더라도 <밀실을 향해 쏴라>를 보는데 크게 무리가 되진 않을 것입니다. 두 이야기를 비교해서 보면 전작에 스쳐지나간 반가운 인물의 재등장을 발견하는 재미와 인물들 간의 변화된 등장 빈도와 비중있는 연기력 같은 재미를 발견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발견의 재미는 별책부록 정도로 여기면 되겠습니다. 단지 아는 사람만 웃을 수 있는 그런 유머가 아니라, 그냥 이 책 한 권의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그 밖에도 웃을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우카이 모리오라는 탐정을 중심으로 그의 조수와 두 형사, 그리고 대저택에 있었던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발생합니다. 그리고 밀실의 공간이 바로 이 대저택 옆에 위치한 해안가 절벽 위의 별채가 됩니다. 흔히 아는 완벽한 밀실의 공간은 아니지만 이 별채로 가는 길이 단 하나 뿐이고, 그 길을 사건과 관계된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밀실이 성립하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처럼 총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디서 조달해내는지 끊임없이 쏴대는 영화 속 총질 장면이 아니라 추리소설 속 밀실의 정적을 깨는 한밤중의 총성이라 더욱 운치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권총과 관련된 알리바이 조사와 풀이가 이색적이고 재미있습니다. 마치 명탐정 코난이 나비넥타이를 입에 가져다 댄 순간의 맹쾌함처럼 말이죠.



    그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이기는 해. 하지만 앞뒤가 너무 딱딱 들어맞는단 말이야. 꼭 누군가가 미리 준비해놓고 차근차근 보여주는 것 같잖아. (182쪽)



    도대체 이 탐정은 왜 이렇게 허둥거리는 걸까? 불가능 범죄가 어쩌구 하던데 그게 무슨 뜻일까? 불가능 범죄라면 밀실이나 완벽한 알리바이나 사람이 없어진다거나 그런 유의 범죄를 말하는데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소리인가? 말도 안 돼……. (228쪽)

 


    사실은 지금까지 권총이 유출된 사연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을 독자 여러분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되었다면 앞으로는 권총 한 자루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 어디에서 어떤 형식으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현명한 독자 여러분은 결코 '리얼리티가 없다.'라는 생뚱맞은 말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25쪽)





    사건에 사용한 트릭의 풀이는 크게 어려운 편이 아닙니다. 탐정 우카이가 폼을 잡으며 트릭을 풀이하기 전에 아마 많은 독자들이 미리 예상하고 범인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용의선 상에 있었던 인물이 몇 안되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렵게 밀실을 만들어 놓고 생뚱맞게 사실은 피해자가 자살한 것이다, 혹은 범인은 풍선같은 기구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 도망갔다는 식으로, 사건의 트릭까지 유머로 승화시키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범인이 만들어 낸 트릭은, 위험요소가 제법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트릭이고,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는데 기타 세부적인 부분을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밀실이라고 해서 정말로 좌물쇠나 걸쇠가 잔뜩 걸린 방이 나와봐야 온갖 소설과 미디어로 눈이 높아진 독자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하지만 그래도 본격 미스터리 애호가라면 일말의 기대를 버릴 수가 없게 마련이다. 그런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하기 위해 오늘도 여전히 범인들은 살인현장에 온갖 자물쇠를 걸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본격 미스터리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이렇듯 열성적이고 일편단심인 범인들의 끝없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문 잠그는 데 힘쓸 틈이 있으면 빨리빨리 도망칠 생각이나 하지.'라고 정곡을 찌르르는 말을 해서 그 사람들의 의욕을 꺾어놓으면 안 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을 잠갔다면 분명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배려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절주절. (255쪽)



    살인사건을 다루는 추리소설 치고는 무척 유쾌하고 명랑한 이야기입니다. 거의 모든 장마다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를 만들어두고 일관되게 과장된 유쾌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작가의 서술 능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독자를 묘하게 자신의 팬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있는 이야기꾼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소설을 읽은 열혈한 광팬들은 소설 속에 나왔던 보험증, 권총, 르노자동차, 사전, 합판조각 등등의 아이템을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 것입니다. 최근에 봤던 가이도 다케루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 우타노 쇼고 <시체를 사는 남자>, 구라치 준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과 급을 같이하는 일본식 유머가 돋보인 추리소설이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집어든 소설인데 꽤 괜찮게 읽었습니다. 섬세하게 조각해놓은 정교한 퍼즐의 트릭을 원했던 것도 아니고, 온갖 더러운 사회문제를 끄집어내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바랬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기대가 적었으니 크게 득템한 기분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밀실을 향해 쏴라>를 보는 시간들이 무척 즐거웠고, 책을 다 보고 덮을 때는 아쉽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이 계속 사건을 쫓아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두손모아 기도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랬습니다. 이 소설 하나로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팬이 되었습니다. 밀실살인에 대한 로망을 충족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머 본격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주었고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세요. 히가시가와 도쿠야 님, 보고 계시나요.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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