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혼진 살인사건>을 읽어 보았습니다. 장편인 <혼진 살인사건>뿐만 아니라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미공개 중편작인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흑묘정 사건>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묶어 두어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인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앞서 있었던 사건과 조사 작업, 그리고 인물들이 계속해서 거론되어 작품들끼리 약간씩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팔묘촌><밤 산책>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보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는 그렇게 생명력을 얻어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인기를 얻을 수 있었고, 또 두터운 매니아층을 확보할 수 있었나 봅니다. 



    <혼진 살인사건>은 일흔작품이 넘도록 오랫동안 인기를 받아온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과연 이 명탐정의 탄생과 첫등장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신화와 같이 여겨지는 한 거대한 제국의 건국시조의 비범한 탄생 비화를 읽는 마음으로 책장을 한장한장 넘겼습니다. 

 


    하쿠비 선의 기요시 역에 내려 어슬렁어슬렁 가와 촌쪽으로 걸어오는 한 청년이 있었다. 나이는 스물대여섯 정도로 보이고, 평균 체구보다는 살짝 작은 몸집의 청년이었다. 붓으로 그린 것 같은 잔무늬의 하오리와 기모노, 그리고 가는 줄무늬의 하카마를 입고 있었는데 하우리, 기모노는 주름투성이고 하카마는 주름을 어디 잡아놓았는지 모를 정도로 늘어져 있었다. 감색 버선은 발톱이 튀어나올 것 같고, 나막신은 끝이 닳았고 모자는 찌그러지고……. 즉, 그 연배의 청년치고는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피부는 흰 편이었으나 용모는 내세울 수준이 못 되었다. (100쪽)



    긴다이치 코스케의 등장. 지금까지 읽은 모든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 이 같은 소제목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더벅머리에 허름한 차림새로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매번 등장하고, 더듬거리는 말투에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대망의 첫 등장 모습에서도 크게 다른 점 없이 마찮가지의 모습이었지만, 묘하게도 그 등장 장면이 없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그 장면이 언제쯤 나올까 기다려지고, 결국 그 장면이 나오니 자신도 모르게 묘한 미소가 입가에 맺히더군요. 나도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 다 되어버렸구나 싶었습니다.



    미스터리 작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한번쯤 다뤄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이 '밀실 살인사건'이다. 범인이 들어갈 곳도 나올 곳도 없는 방 안에서 자행된 살인사건, 그것을 멋지게 해결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엄청 매력적인 작업일 것이다. (12쪽)



    그럼 추리 소설 작품으로의 <혼진 살인사건>을 이야기하자면,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 트릭으로 밀실 살인사건을 선택했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밀실 살인사건이야말로 미스터리 작가가 한번쯤 다뤄보고 싶어하는 트릭이라는 뜻을 살짝 내비취기도 합니다. 본격 추리 소설의 거장이 낸 문제이니 만큼 <혼진 살인사건>에서 나오는 밀실 살인의 해법에 도전해서 꼭 이겨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만 우타노 쇼고<밀실 살인 게임>에서 처럼 게임을 위한 인위적인 밀실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있는 기계적인 트릭을 풀며 밀실 그 자체에 대해 신성시하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 사건이라는 점(그만큼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니)에서 그 사건이 밀실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현실적이고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혼진 살인사건>은 그런 점에서 점수를 모두 잃었다가 한번에 본전을 되찾아온 도박 게임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자칫 잘못 했다가는 삼류 트릭을 이용한 추리소설이 될 수도 있었지만 소설 속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의문을 품을 독자가 없을테니 일류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부님, 제가 지금 보여드린 마술 트릭,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개 마술 트릭이란 건 알고 보면 그런 식으로 어처구니없는, 오히려 애들 속임수 같은 겁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진짜 무서운 점은 어떻게 해서 그런 짓이 행해졌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일이 행해져야만 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반드시 겐조 씨라는 사람의 성격과 이치야나기 가문의 분위기부터 이해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8쪽)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흔편이 넘는 한 시리즈가 꾸준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에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동일한 등장인물과 본격 추리의 트릭들이라는 공통되고 일관된, 어찌보면 단순하고 지겨울 수 있는 이야기를 서술 형태의 변화를 통해 극복해 나가려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서술 형식의 변화를 꾀한 작가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까다로운 입맛의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흑묘정 사건>에서는 긴다이치 코스<혼진 살인사건>에서의 활약상을 잡지에 투고한 작가 Y씨가 긴다이치 코스케 본인에게 직접 본격 추리소설의 단골 트릭으로 괜찮을 것 같다며 <흑묘정 사건>의 자료를 받아서 쓴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작가 Y씨는 요코미조 세이시 본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런 서술은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소설 속 인물이 다시 한번 생명력을 얻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설마 긴다이치 코스케가 실존 인물이었나, 라는 착각과 상상에 빠지며 "아차, 작가에게 당했구나." 하는 마음에 대상없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또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나>에서는 이 이야기를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라고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긴다이치 코스케는 주변인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사건이 이미 종결된 상태에서 사건의 내막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일을 직접 겪었던 등장 인물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시간순서대로 나열하는 형태로 사건 속의 인물이 느낀 사건에 대한 의혹과 진상에 대한 상상, 나름의 추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서술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반칙적인 반전을 보인 <밤 산책>과 용의자의 신분이 되어보는 <팔묘촌>에서도 변화무쌍한 서술 형태를 보이고 있으니,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에서는 본격 추리는 물론이거니와 서술적인 재미도 같이 느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Y씨, 저는 새삼 '사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는 케케묵은 속담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진 살인사건' 서두에 이런 사건을 계획한 범인에게 감사해도 좋겠다고 당신은 쓰셨죠.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 무서운 '얼굴 없는 시체'사건을 계획한 간악무도한 범인에게 일단 감사하십시오. (중략) 당신이 이 소재를 어떤 식으로 소화하실지, 갖가지 잡다한 서류들을 어떤 식으로 편집하실지 솜씨를 보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긴다이치 코스케 올림 (348쪽)



    서술 형식뿐만 아니라 본격추리의 트릭에서도 영미 추리소설(요코미조 세이시의 시대의)에서 등장했던 간단한 기계적 트릭을 넘어서고자 하는 변화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흑묘정 사건>에서는 본격 추리 소설의 단골 메뉴이면서 A가 범인인줄 알았지만 B가 사실은 범인이라는 뻔한 결과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얼굴없는 시체' 트릭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요코미조 세이시는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뻔한 트릭은 오히려 현실 세계가 아니라 소설 속에서만 완벽히 들어맞게 나올 수 있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트릭뿐만 아니라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로 인해 더 복잡하게 얽히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하물며 <흑묘정 사건>은 겉으로는 '얼굴없는 시체'의 트릭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른 형태(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어떤 형태인지는 숨겨서)의 본격 추리 트릭의 단골 메뉴가 나오고 있으니 참신하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혹시 미스터리에서 얼굴 없는 시체, 즉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난도질 당했다든가 목이 잘려 없다든가 시체가 불에 타 얼굴을 분간하기 힘들다던가 혹은 시체 그 자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든가 하는 사건에 부딪치면, 이건 십중팔구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게 틀림없다. (354쪽)



    <혼진 살인사건>은 종합 선물세트 입니다. 1946년의 첫번째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인 <혼진 살인사건>을 필두로, 이어 집필한 1947년의 <흑묘정 사건>과 1955년에 발표한 중편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까지 완전히 다른 색깔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한번에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3개의 이야기를 묶어 놓은 편집자의 의도가 어렴풋이 보일려고 합니다. 따로 읽었더라면 덜 했을 수도 있는 재미와 감동이 같이 읽음으로서 작품들 간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소소한 발견들을 독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게 만들어, 결국에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매니아가 되어버리게 만들려는 악랄한 의도 말입니다. 아아, 그 의도에 당했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더 많다는 사실과 모험은 아직도 무한하다는 설레임 때문입니다. 그리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아직도 생명력을 갖고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supply.blog.m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