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명의 미스터리 동호회 대학생들이 외딴 섬에 위치한 십각형의 모습을 띈 건물, 십각관으로 여행을 갑니다. 그 섬은 반년전에 기이한 살인 방화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십각관은 그 살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한 인물이 특별히 설계해서 건축한 건물입니다. 미스터리 체험에 들떠 있던 동호회 학생들은 하룻밤을 보낸 뒤, 소설에서만 봐왔던 사건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공포에 떨며 나름의 추리를 펼쳐봅니다. 그 일곱명의 동호회 학생의 이름은 엘러리 퀸, 존 딕슨 카, 가스통 르루, 에드가 앨런 포, 아가사 크리스티, 바로네스 오르치, 반 다인 입니다.

<십각관의 살인>에 등장하는 이 일곱명의 인물들은 모두 유명 추리작가의 이름을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동호회 전통으로 추리작가들의 이름을 별명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을 일본 추리소설의 신본격의 장을 연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격 고전 추리소설 대가들의 이름을 빌린 설정이 본격 추리소설의 부활을 염원하는 작가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한때 일본을 풍미했던 사회파 식의 리얼리즘 추리소설은 고리타분하다는 비판도 서스럼없이 내뱉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그의 <십각관의 살인>은 고전 추리 소설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봅니다.
나에게 있어 추리소설이란 단지 지적인 놀이의 하니일 뿐이야.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독자 대 명탐정, 독자 대 작가의 자극적인 논리 게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 미스터리에 걸맞는 것은 명탐정, 대저택, 괴이한 사람들, 피비린내 나는 참극, 불가능 범죄의 실현, 깜짝 놀랄 트릭……, 이런 가공의 이야기가 좋아. 요컨대 그 세계 속에서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거지. (15쪽)
외딴 섬에 기이한 형태의 건물, 그리고 그 안에서 한명씩 죽어가는 친구들. 범인은 외부의 인물일까, 내부의 인물일까. 어디서 많이 본듯한 플롯입니다. 추리소설하면 빼 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대작,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하나 둘씩 사라지는 인디언 인형들과 그 아래에 쓰여진 이상한 시. 그리고 그 시가 예언이 되어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이야기. <십각관의 살인>도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호회 대학생들 모두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이미 읽었고 그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각관의 살인극이 책의 내용과 비슷했다면 그들도 당연히 살인극을 눈치채고 범인에게 당하지 않았을 테죠.
간단하다고 비밀을 밝혀도 되는 건 아니야. 맨 처음에 보여 줬던 것은 어린애도 알 수 있는 간단한 트릭이지만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미스터리를 가장하는 연출력이지. (50쪽)
그러한 연출력이 필요했던 이유, 그것이 범인이 바라던 바였을까요. <십각관의 살인>을 다 읽은 후에 범인의 행동을 다시 따라가보며 읽어봤습니다. 이런 살인극이 가능할 것이라고 범인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더군요. 그러면서 우연까지 철저하게 대비한 준비성과 때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훌륭한 연출극을 선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사건에 심리적인 요인도 많이 작용하고 있고, 그런 점까지를 모두 예상했다, 라는 이야기라 범죄 과정을 납득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으니 두 작품을 계속해서 비교하게 되네요.
정말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만한 작품입니다. 특히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그 한줄, 모두를 죽여버리는 그 한줄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전율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소설 팬으로서 느낄수 밖에 없었던 몇가지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로...
'피해자'가 된다는 의미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서 였을까. 또는 미리 '형(刑)'의 선고를 해두지 않으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묘한 의무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보다 다른 차원의 통렬한 풍자를 담을 생각이었을까……? (324쪽)
추리 소설은 무대가 중요합니다. 눈내리는 산장, 외딴 섬,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배경과 밀실의 살인 사건. 십각관은 이름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무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고전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트릭과 기이하고 공포스런 오묘한 분위기의 느낌을 좋아하는 추리소설 팬들에게 추천합니다. 마지막까지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심경과 찝찝한 여운 때문에 마치 범인과 일심동체가 된 묘한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서평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가, 이렇게 끝내야 하는가, 라는 복잡한 생각이 들면서 글을 보내는 것 마저도 아쉽습니다.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