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에 대해 미야베 미유키는 자신의 문학의 아버지라고 하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합니다. 그 외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들 역시 입을 모아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대단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 마쓰모토 세이초가 생각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은 어떤 모습의 소설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물리적 트릭이 아닌 심리적 작업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작가가 만들어 낸 특이한 환경이 아니라 일상에서 설정을 찾으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을 등장시킨다. 또 누구나 경험할 만하고 어디서나 일어날 것 같은 서스펜스를 추구" 하는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설,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 <제로의 초점>을 읽어 보았습니다.

 


 


    낯선 땅, 사실이 그랬다. 남편의 발자취가 남은 곳이지만 삭막하기만 하고 감정이 스며들지 않았다. 신혼여행 때 먼발치에서 보았던 북국의 하늘 아래, 그 땅에 대한 동경은 참으로 덧없는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우하라 겐이치와 결혼했다는 것조차 현실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78쪽)



    데이코는 중매를 통해 우하라 겐이치를 소개받고 결혼을 합니다. 중매 결혼이라 신랑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차차 알게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흐리고 가늘게 뜬 멍해보이는 그의 두 눈과 그녀에게 가끔씩 했던 묘한 말들로 인해 복잡한 과거를 가진 남자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아차린 데이코, 하지만 별탈없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도쿄의 신혼집에 도착하였고, 겐이치는 예전에 일했던 가나자와에 업무 인계를 위해 곧바로 그녀 곁을 떠납니다. 그런데 12일에 오겠다는 엽서 한장을 남긴채, 그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연락도 없습니다. 



    홀로 이런 곳에 서서 북쪽 바다를 바라보는 자신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사라진 남편을 찾아 헤매는 가련한 아내였다. 의지할 데 없는 젊은 아내가 여기에 있다. (135쪽)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실종을 경험한 데이코, 그런 데이코에게 겐이치는 남편이지만 타인과 마찬가지로 잘 모르는 한 남자입니다. 남편이라고 부르기에도 이상할만치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을 찾기 위해 북국의 노도 반도를 헤매입니다. 마치 원래 없었던 존재였던 유령을 쫒듯이 말입니다. 그러다가 사건은 점점 커져서 실종으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살인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점점 미스터리해집니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말했듯이 이 소설의 처음은 평범한 일들의 반복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남편과 관련된 미스터리한 사건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점점 미궁으로 빠집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을 향해갈 땐 그것이 한 사회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큰 그림으로 이어집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가 말하는 소설의 참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섬세한 전개와 구성이 돋보인 소설이었습니다.



    1959년 소설이라 오래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영화 한편을 본다는 생각으로 보니, 역사의 유물이 된 각종 소품들과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들, 당시 일본 사회의 풍경들까지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 보였습니다. 대단했습니다. 특히 북국의 절벽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멋있다'가 아니라 '무겁다'입니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 파도를 따라서 올라오는 거센 바람, 그 때문에 살을 애는 듯한 추위와 차가워져 있는 마음, 그리고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과 검은 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풍경의 장소를 등장인물을 따라서 수없이 왔다갔다 하다보니, 추위 때문에 얼굴이 다 터서 하얗게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데이코는 홀로 그곳에 내렸다. 그녀는 흩날리는 눈 속을 뚫고 절벽으로 향했다. 메마른 풀들이 깔렸다. 구름도 낮다. 언젠가 이곳에 왔을 때는 멀리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발이 비쳐 그 부분만 바다가 반짝였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늘이 온통 검은 구름으로 덮였다. 햇살도 없고 구름도 무겁게 내려 깔렸다. (281쪽)



    작년 즈음에 본 다카노 가즈아키<13계단>이 생각났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한 쪽은 바다, 반대 쪽은 험준한 산이었던 배경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사회파 추리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로의 초점>과 정 반대의 그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3계단>은 한여름 태풍이 불어오는 날의 해안이 주 배경이었고, 시작부터 법과 제도에 대한 사회 문제에 대해 깊이있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완전히 반대되는 그림인 <제로의 초점>은, 겨울의 눈내리는 날들, 그리고 일상의 시작으로 잔잔한 파장이 일다가 그 파장이 점점 커지면서 사회 문제가 두각되는 이야기입니다.



    패전으로 상처 입은 일본의 여성이 1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했음을 말해준다. 약간의 자극만 있어도 오래된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394쪽)



    이 소설에서 말하는 사회 문제라는 것은 전후 일본 사회의 어두웠던 일본 여성들에 대한 애매한 위치와 그 때문에 겪게되는 아픔을 말합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일본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길을 걷는 일본 여성들, 그런데 어둠이 걷히면서 드러나는 아픔 때문에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져야만 했던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보다 본격 미스터리를 더 좋아합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는 일본 사회에 국한된 내용을 간혹 담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공감하기가 힘든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소설에서도 그런 면이 약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역시 대단한 소설이구나를 느꼈습니다. 남들이 인정하는 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를 말이지요. 문득 이 소설의 제목, '제로의 초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데이코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가면서 혼자서 사건을 추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준경 속의 범인 X를 찾기 위해 초점을 마춰가다가 결국 시야가 하나로 좁혀집니다. 하지만 망망해대에서 바닷바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뜬 가늘고 멍한 눈빛을 하며, 사라져가는 과녁이 하나의 점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과 심정이 제로의 초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아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제로가 되어 사라져 버렸을 테고, 사회 문제 역시 제로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나간 일을 재조명하려는 작가의 초점있는 시선이 없으면 말입니다.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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