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클로즈드 써클' 추리소설의 로망이라고 일컫는 환상적인 밀실 무대를 말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십각관의 살인>과 같은 바닷가 외딴 섬이나 <소년 탐정 김전일>, <명탐정 코난>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눈사태로 길이 막혀버린 폭설 속의 산장과 같은 밀폐된 공간을 말하는데요, 자연 상태의 커다란 밀실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완벽한 꿈과 같은 밀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격 추리소설에서는 단골 손님처럼 자주 등장하는 배경으로 매우 자주 사용되고 있어서 단골 중에서도 VVIP 정도로 취급됩니다. 이 소설의 작가 구라치 준도 자신의 작품을 '본격 미스터리가 아니라 본격 미스터리의 패러디다'라고 하고 있으니, 본격 추리소설의 아이템은 돌고 도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바로 아래에서 길이 막혔습니다. 산비탈에서 눈이 무너져서요. 바람 때문에 그렇게 됐겠지요. 가벼운 눈사태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지나갈 수 없습니다. 눈 속에 차가 처박혀서 하마터면 오도 가도 못할 뻔했습니다. (192쪽)



    그런데 구라치 준<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돌고 도는 클로즈드 써클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하면서도 자신만의 맛과 색깔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제목처럼 몇명의 인물들이 살인사건이 일어날 무대가 되는 산장으로 갔다가 고립되고, 그 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며, 또 그 속에서 추리를 펼쳐나가며 용의자를 좁혀나가고, 결국엔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단 한 줄로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이렇게 요약을 했지만, 이건 이 소설이 가진 표면적인 부분을 이야기한 것 뿐이지, 이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소설로 완성시켜내는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그 능력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면 될 것입니다. 그래도 간단하게 조금만 알려 드리자면, 방금 제가 간단하게 요약했던 이야기가 무려 45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게 이어집니다. 구라치 준 특유의 '유머'와 함께 말이죠. 특히 각 장이 시작하려고 하는 부분에서 미리 독자에게 넌지시 스포일러를 던지는 부분들-사실은 스포도 아닙니다-이 있습니다. 그런 것쯤은 독자가 다 알아서 눈치 챌테니까 좀 조용히 하고 있어 줄래?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모습의 간단한 코멘트를 달고 있는데요, 그렇다고 그것이 싫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 소설을 '직구로 승부하는 추리소설이다'라는 비유를 많이 하던데, 맞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식으로 직구를 던지겠다고 독자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풀이 과정에서도 마찬가지구요. 범인이 밣혀지는 순간까지, 어쩌면 이렇게 본격 미스터리 패러디를 강행하는 '재미'로 똘똘 뭉쳐져 있을 수 있는지, 마치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만찬이 시작되자 화제가 UFO까지 뻗어나가면서 이야기꽃이 핀다. 사건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루해하지 말 것. 중요한 복선 몇가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93쪽)


    시체가 발견된다. 살해 방법은 눈으로 확인한 그대로이고 부자연스러운 트릭 따위는 사용되지 않았다. (163쪽)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모인다. 나중에 나올 피해자와 범인 역시 이 가운데 있다. ○○는 종반의 추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75쪽)



    이런 블랙코미디식의 유머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은은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재미'도 물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쓰려면 이것만 지키면 된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요, 거기에 나온 거의 모든 규칙들을 철저하게 따른 소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등장인물들은 매우 개성있는 인물이어야 추리소설이 재미있을 수 있는데, 특히 남자는 잘 생긴 꽃미남 스타일이어야하고, 여자는 은근히 육감적인 매력을 뽐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그런 늬앙스의 개성있는 캐릭터를 은근히 잘 살리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의 화자의 입장이 되어서 화자가 품고 있는 풋풋한 마음과 혼잣말들까지 중얼거리게 했던, 묘한 맛과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억지 웃음이 아니라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자연스런 웃음이었습니다.



    살인과 인스턴트 라면. 이 조합도 어쩐지 조금 우스꽝스럽기는 하다. 서민적인 살인 현장. 사회파 추리소설인 셈이군. (217쪽)



 

크롱의 혼자놀기 성분표입니다. 재미로 봐주세요.



    그러면 이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추리의 논리성은 어떠했는가, 모든 추리소설이 그렇겠지만 범인이 아니고서야 마지막에 모든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독자가 범인의 살인 동기까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건 이 소설 안에서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살인 동기는 맞출 수 없더라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독자가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명쾌한 맛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소거법이라는 방법으로 등장인물들 중에서 범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을 지워나가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처럼 탐정 역을 하는 인물이 마지막에 무려 2페이지가 넘어가는 일장 연설을 통해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똘망똘망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논리 정연하게 사건을 정리하고 말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정말로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명하는 과정 속에서도 독자가 범인을 추론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같은 것을 심어뒀으니, 독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범인을 맞춰보는데 주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선 정정당당한 승부와 함께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씨까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 추론에 구멍은 없을 겁니다. 다만 어떤 조건의 대전제가 잘못됐다면 이야기는 별개지요.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추론을 거듭한 결과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조건 중에 어느 것의 전제가 근본부터 틀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릇된 결론이 도출된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전제가 사실과 다를까요? (418쪽)



    범인이 드러나기 일보 직전에는 구라치 준이 말했던 본격 미스터리에 대한 패러디가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극적인, 이 장면 역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맺어지는 엔딩씬까지 만화 같은 형국을 보이고 있는데요,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나오는 당연한 끝맺음이겠지만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나오는 극적인 전개는 아마도 '웃음'과 '재미'를 위한 끊임없는 패러디에서 온 당연한 전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보다 더 본격추리소설다울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그런 극에서 추리소설에 대한 향수, 그리고 꿈, 낭만. 뭐,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너무 큰 비약이 될까요.



    '교훈이 없는 소설이다', 주로 본격추리소설에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훈이 없는 책이라도 그 책을 봤던 시간들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는 생각이드는 소설 몇 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도 그 소설 중에 하나입니다. 낭만과 여유, 모험, 세상과 떨어져서 모든 것을 잊고 잠시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말입니다. 이 소설을 읽었던 시간은 저에게 눈내리는 산장같은 밀실에 몸을 내던져 맡길 수 있는 그런 꿈, 그리고 밀실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줬습니다.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별이 내려오는 꿈과 같은 산장에서 정말로 제 자신이 사흘간의 대모험을 즐겼던 것만 같은 오롯한 감정들이 아직도 이 두 손에 남아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볼 때, 저는 그 멀고 힘들었던 여행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별빛은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을 잊지 말라는 염원을 품고서 우리 인간을 향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한결같은 마음, 순진한 마음은 제 마음을 감동으로 떨리게 만듭니다. 여러분도 오늘 밤 만약 날씨가 좋으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별은 분명히 여러분의 마음에도 말을 걸어줄 테지요. 그러면 잠시만 별의 말에 마음을 열어주십시오. 청정하고 평온한 시간을 맞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청아한 보석과도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자, 섭섭하지만 시간이 다 되었네요. 그럼 다음 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29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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