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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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만 읽으시라... 유혹적이지 않은가? 저자는 밤에 쓴 소설이니 독자도 밤에만 읽기를 권하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그 뜻을 잘 지킨편이다. 독서환경은 그 소설을 이해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둡고 고요한 밤을 벗삼아 낮에 숨죽이고 움추러 들었던 욕망을 끄집어 내 쓰여진 글처럼, 나 또한 최대한 그 분위를 담고 싶었다. 소설에선 그런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으며 연애소설과 추리소설의 요소가 적절히 잘 어울어져 두가지 묘미를 맛볼 수 있게 해주었다. 
 
처음 서평으로만 마주했던 소설은 관능적 요소와 삼각관계에만 초점을 두었었다. 17살 소녀가 있고 예순아홉 먹은 늙은 시인이 있다. '사랑엔 국경이 없다'는 말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라는 단순한 논리로, 50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애처러운 러브스토리가 펼져질 줄 알았다. 그러나 책장을 덮으면서 나의 사전 판단은 크나 큰 오산이었음을 그자리에서 깨닫게 되었다. 애(愛)욕과 성(性)욕, 탐(貪)욕, 그 욕망들이 불러 일으킨 시기와 질투, 죽음까지 앞당기며 펼쳐지는 소설은 읽는 내내 안타까움과 슬픔을 교차시켰다.

시대에 영향력 있는 유명한 시인 이적요가 사후에 남긴 노트, 그의 제자이자 단번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서지우의 갑작스런 죽음, 그 사이에 17살난 소녀 은교가 있다. 그 곳에 사랑과 질투 그 욕망의 화신들이 불러 일으킨 죽음이 뒤따른다. 적요와 서지우가 사제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그들은 어둠의 동굴로 깊숙히 빠져 들었으며 대필 소설까지 내 화근을 만든다. 은교가 등장하면서 욕망의 불구덩이는 더욱 더 활활 타오른다.
 
많은 오해들과 애증속에 담긴 진실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다던 스승에 대한 서지우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멍청한 제자로 낙인찍힌 서지우에 대한 이적요 시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제일 잘 안다고 착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오해 속에서 스승은 제자의 청춘을 질투하고, 제자는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스승의 재능을 질투했다. 그것이 은교를 통해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젊은 청춘에 대한 질투가 빚어낸 결과'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적요 시인은 첫 만남부터 멋스럽게 자리잡은 서지우의 쌍꺼풀을 시기했다. 자신의 지난날의 젊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자태에 '멍청한 놈'을 같다 붙여 질투의 화신을 달랬을 것이다.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작가는 죽은 작가다. 적요시인은 '작가 서지우'를 미워했다. 한 인간으로서는 사랑했었다. 은교가 사제간에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했던 말처럼 외로운 두 남자는 서로를 의지하며 기댔었다. 둘은 닮은 구석이 참 많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은적이 없었고, 불안정한 결혼생활을 겪었다. 그러던 중 서지우는 은교를 통해 안정을 찾으려 했으며 적요 또한 첫사랑의 이미지를 은교에게 떠올렸다.  

   
  '처녀'라는 어휘가 얼마나 신비한지 너는 모를테지. 시간의 장애는 이럴때 나타난다. 어떤 낱말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격은 때로 저승과 이승만큼 멀거든. (…) 단언컨대, 너와 나 사이에서 이보다 큰 슬픔은 없다. 마찬가지로 너에게 처녀는 그냥 처녀일 뿐이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처음이고 빛이고 정결이고 제단이다.  
   

어떤 단어의 이미지는 그사람의 삶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내온 환경과 배경이 다르다면 그 의미 또한 변하는 것이다. 적요시인은 소녀와 자신의 그 세월이 주는 경험의 차이를 알기에 세월의 벽 앞에서 슬퍼했던 것일 게다. 

   
  '아름다운 별'이라는 건 그의 생각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주입한 생각이었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 별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었는지 모르지만,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 - p.30  
   

서지우가 이 말에 반해 이적요와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 듯 나 또한 이 말을 본 순간 단번에 소설로 빠져 들었다. 독자에 따라 소설을 해석하는 데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은교]를 단순한 러브스토리로 보지 않는다. 책의 제목이자 여주인공 '은교'는 사랑과 질투, 청춘을 아우르는 고유명사로 소설 속에 존재했다. 과연 적요시인의 욕망은 서지우의 생각대로 위험하고 비정상적인 것일까? 내 생각엔 늙고 병든 건 서지우였다. 자신의 시간을 뛰어 넘으려던 이적요의 욕망의 역주행은 비극적이지만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다. 썩은 관이든 나이 많은 당나귀든 사막의 낙타든 그대로의 존재 가치가 있고 나름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는 중이다.

폭풍처럼 쓰인 소설처럼 서지우와 이적요가 서로에게 가하는 일침은 직설적이고 거침없었으며, 내 가슴까지 아리게 했다. 그 둘을 지켜보는 독자로서는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최후에 이적요 시인이 은교를 통해 보았던 마지막 관경이었다. 관능에서 시작된 들끓던 욕망이 사그라지고 진정 아름다운 젊음을 보았다는 것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자기모멸을 일삼으며 외롭게 늙어갔던 한 시인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 준 대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처럼 거침없이 써내려 가고 싶었으나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쳐 어눌한 글을 늘어 놓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무미건조한 내 글에 비하면 차라리 열일곱 소녀를 향한 적요시인의 들끓던 갈망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인간의 욕망을 비판할 자격이 나에겐 없을 뿐더러 사랑이 무엇이다라 규명지을 자격은 더 더욱 없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의 진심이 상대에게 가 닿는 마음 그것만으로도 그 자체는 소중하고 존귀하며, 비난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ㅡ 늙어 간다는 건 죄가 아니다. 누군가가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것 처럼 내 내면의 그것과 상대의 그것이 합일을 이룰 때 가장 빛나는 사랑의 발화가 시작될 것이고, 그것을 고유한 사랑의 이름으로 꽃 피울 수 있지 않겠냐고 곱씹어 본다. 이 모든 것은 고귀한 경험이며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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