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독서 지침을 수용하지 않는다. 특히 칼라와 몸판의 색깔이 확연히 다른 셔츠 차림의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귓전으로도 안 듣는다. 인간적으로는정이 가지만 문학 취향이 의심스럽거나 질색인 사람이 빌려주거나 선물하는 책은 사절하고 싶다. 열네 살 때부터 줄곧 경멸해 - P32
왔던 책을 친구가 자기 인생을 바꿔놓은 책이라면서 건네주는불편한 순간이 나는 겁난다. 특정 도서에 집착하는 사람들은그 책이 아무리 자기들에게 의미가 있을지언정 어떤 이에게는『어느 팬의 기록(A Fan‘s Notes)』이나 연초 도매상(The Sot-WeedFactor)」이나 『어린 왕자』나 『듄』을 즐겁게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 못한다. ‘천국에서 마주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여섯 사람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할 1001곳‘ 유의 책은 더욱더 어림없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악명 높은 동독 국가보안부(Stasi)가 나서면 모를까, 안 될 일이다. - P33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속 정체불명의 만찬실에서 작가와 사적으로 영성체를 나눈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자기는솔 벨로가 아주 오래전부터 주위에서 얼쩡대던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자기에게 뭔가 한 수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의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느끼는 기분이 딱 그렇다. 조기 은퇴를 고려 중인 노년층이라면일단 『리어 왕을 읽어봐야 한다. 어린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하는 중년 남성은 먼저 몰리에르를 참고하시라. 사랑이 영원할거라 믿는 젊은이라면 뭔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전에 폭풍의 언덕』을 슬쩍 봐주면 좋겠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책을 통해 직접 그들에게말을 건다고, 나아가 그들을 돌봐주고 치유해준다고 느낀다. 그들은 종종 작가가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사람들은 항상 이 작가 혹은 저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를대지만, 사실 특정 주제에 대한 독자의 생각을 작가가 글로 정확하게 옮겨주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그들은 작가를 일 - P38
종의 영매처럼, 무언의 존재에게 목소리를 빌려주는 역할로 본다. 내 입장은 다르다. 나는 작가들이 내 생각이 아닌 말, 어떤면에서는 내가 아예 생각조차 못할 말을 한다고 느낀다. 누군가가 미국 최고의 여류 시인 운운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에게 접근하려면 무릎을 꿇고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내 생각도그렇다. 위대한 작가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기에, 그들의말을 반복하는 바로 그 행위가 삶 자체를 한결 아름답게 한다. 로렌스 더렐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는 도시가 세상이 된다고 했다. 앨리스 먼로는 기적을 믿는 사람들은 정말로기적이 일어날 때 법석을 떨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면 미소를 지을 겁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이렇게 헤어짐이 잘하는 일이지요." 이건 셰익스피어의 문장이다. 작가를 앞에 두고 "당신은 내가 생각하던 바를 콕 짚어 말해주었어요!" 라고 떠드는 사람은 바보다. 그런 사람이 대략 널리고 널렸다. - P39
다. 책이 늘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진 않아도, 확실히누군가는 가고 싶어 할 곳으로 데려다준다. 책에 환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현실에 만족 못 하는 사람들이다. - P39
북클럽 회원들이 공유하는 독서 경험은 내밀하지가 않다. 북클럽 참가자는 책에 대해 자신과 아주 똑같이 느끼는 사람들하고 연결되기를 원한다. 독서 토론회는 사실 독서와 거의 무관하다. 이런 토론회에서 좋은 책을 좀체 선정하지 않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토론 참가자들은 만장일치를 원하지만 좋은 책은만장일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좋은 책은 다툼, 혼란, 칼부림, 혈투를 부른다. - P75
속독은 게으름뱅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린이책은 어린이가 읽는 책이다. 점수기록하는 사람도 없는데 권수가 왜 중요한가. 그러한 노력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지 보려고 마라톤에 뛰어들어 코스 절반까지 잘 와놓고 왜 이런 바보짓을 할까 깨닫는 것과 내처 비슷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중간 과정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매일첫 페이지에서 박차고 나가 그날 밤에 마지막 단어까지 해치운다는 게 얼마나 상쾌한지. 나는 실전을 수행하면서 로버트 네이선의 『제니의 초상』,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앰브로즈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같은 고전들을 읽었다. 뮤리엘 스파크의 신랄한 소설 세 권, 조이스 캐럴 오츠가 속성으로 써낸소설 두어 권도 읽었다. 특히 『블랙 워터』에서 저자는 채퍼퀴딕섬 사건‘을 물에 빠져 죽은 피해자의 시점으로 그려냈다.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 세 권, 폴라 폭스의 참혹한 회고 『절망의그림자(Desperate Characters), 피터 테일러의 『재력 있는 여자(A - P129
도 읽었다. 로리 무어, 수전 마이노, 레이놀즈 프라이스, 퍼트리Woman of Means)』, 토머스 키닐리의 『지미 블랙스미스의 노래, 샤 하이스미스, 배리 해나 같은 유명 작가들의 단편집과 팀 패리시, 에바 파이지스, 마크 리처드, 브래드 왓슨, 크리스틴 슈트, 존 비그네처럼 조금 덜 유명한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패리시의『레드 스틱 맨과 비그네의 『고문관 견습생은 특히 값진 발견이었다. 나는 트루먼 커포티의 나른한 첫 소설 『서머 크로싱, 테네시 윌리엄스의 황량한 첫 소설 『로마의 애수(The Roman Springof Mrs. Stone)』, 월리스 스테그너의 놀라운 데뷔작이자 역작 『리멤버링 래프터(Remembering Laughter)』도 읽었다. - P130
나는 진지한 독자, 요컨대 강박적인 독자라면 모두 머릿속에서 착착 돌아가는 시계나 미터기 따위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지 어렴풋이 생각해서 그에 맞게 독서습관을 잡는다. 일단 나처럼 예순을 넘으면 대(大)플리니우스를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는 따져볼 여지가 있지만 펄 벅에 할애할 시간은 결단코 없다. 이때부터는 무슨 책을 읽든지 그게 이승에서 읽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 대지를 마지막 책으로 삼을 순 없지 않은가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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