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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알다 해를 살다 - 생명살이를 위한 24절기 인문학
유종반 지음 / 작은것이아름답다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올해 절기로는 입춘과 우수 사이에, 내 삶의 때로는 초가을 즈음 만났다.
책 제목은 <때를 알다 해를 살다>지만, ‘때를 알고 삶을 살다’로 고쳐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한해살이 이야기가 삶의 잠언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렇다고 숨이 턱하고 막히는 빼곡함은 아니다. 어느 볕 좋은 가을날, 시골집 마당에 뿌리 깊은 감나무의 과실처럼 ‘익은 이’의 성찰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러므로 한 해를 책에 나온 대로 살아간다면, 그 고독과 열심과 인내와 몰입이 차곡차곡 쌓이고 무르익어 ‘상강’ 즈음에는 훌훌 벗고 비워놓는 참이치를 깨달을 지도 모를 일이다.
<때를 알다 해를 살다>는 봄이 아닌 ‘겨울’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겨울은 끝의 절기가 아니라 시작의 절기’라고 말하며 ‘봄과 여름과 가을을 낳은 어머니 같은 절기’라고 했다. 시작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다. 겨울이 시작의 절기라니. 봄의 그 요란 법석함과 알레르기 비염 같은 살짝 무기력한 혼돈이 시작이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는 흔히 한 해나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로만 인식한다. 봄에 귀엽고 여린 싹이 나기 전, 겨우내 웅크리며 기다린 씨앗의 인고는 기억하기 쉽지 않다. 겨울은 모든 생명들이 단지 죽음의 상태, 동면, 혹은 휴식기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봄에 잉태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겨울에 이미 생명의 움직임은 시작되고 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다. 3월 새 학기가 되었다고 바로 ‘언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 학년을 마치고 겨울을 지내며 자기도 알게 모르게 영글고 다듬어져 몸도 마음도 ‘언니’가 될 채비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절기 이야기를 쉽고 편안하게 들려줄 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과도 빗대어 말하고 있어서, 책 읽는 내내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횟수가 잦았다. 수시로 ‘나는 지금 어느 때인가?’를 곱씹어 보았다.(두 절기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함께 생각해 보자’의 질문이 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꼭 성경 공부를 하는 마음으로 질문에 속으로 답해 보았다.) 분명 내 육체 나이는 마흔을 넘어 추분 즈음인 듯하나, 아직도 서툴고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꼴은 추분이라 말하기 부끄럽다. 아니다. 저자가 내게 준 가르침은 꼭 크고 실한 열매,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자신의 생명설계도대로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몰입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나도 눈에 잘 안 띌지언정 꽃은 꽃이다.
겨울 절기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읽고 봄의 절기로 들어서니 술술 읽혔다. 겨울 절기 때 자꾸 밑줄 치고 생각에 잠기느라 못 뺐던 진도를 봄과 여름에서 쑥쑥 잘도 뺐다. 그러다 처서와 백로를 지나니 다시 읽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열매가 익는다는 것, 곧 성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란 질문 앞에 선 것이다. ‘뜨겁고 따가운 태양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 그 성장통에 신음하는 것. 그리고 그걸 버틸 수 있는 것, 그리고 시작과 질주하던 때를 그리워하지 않고 다가올 한풀 꺾인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조용히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러한 문장을 앞에 두니, 내 가을 인생을 생각함과 동시에 열매 하나도 허투루 먹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흔히 하는 말로 정말 열매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겨 있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나도 이 책의 마지막 절기로 소개된 ‘상강’의 때를 맞는다. 앞으로 난 누구의 밀알이 될지, 불편한 진실에 더 다가가며 살아낼 수 있을지 더욱 더 부지런히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상강 즈음 돌아봄의 시간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