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꽃 -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들의 끝나지 않은 미술 수업
이경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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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라도 만개할 수 있기를

  ‘아이 캔 스피크’. 작년 개봉된 한국 영화. 꽤 인기를 끈 그 영화는, 일본군 성노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신규자 교육 때, 이런저런 조모임을 많이 했다. 기업 가치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프리젠테이션을 해보라는 과제도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아이 캔 스피크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화는 거의 안 보는 내가, 대략적인 줄거리나마 알 수 있게 된 건 그 덕분이었다.
 
  몇 가지 자기 규칙이 있다. 문서로 만든 것도 아니고, 가끔 어기기도 하지만, 가능한 한 지키려고 하고 있다. 겪지 않은 일은 함부로 말하지 말 것. 모든 기준은 피해자에게 맞출 것. 이 둘도 자기 규칙에 들어간다.
  그 끔찍한 일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자기 딴에는 위로랍시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행위. 상대방에게는 참기 힘든 모멸일 수 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를 때는, 아무 말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다면 딱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무어라 말씀드리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고 글을 끝내버리면 휴머니스트에서 싫어하겠지. . 여기서 광고. 서평단 이벤트로 받은 책입니다. 이하 내용은 평소와 문투, 어조 등이 다룰 수 있습니다.
 
  1990년대. 갓 대학을 졸업한 저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 모임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저자는, 미술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무슨 그림. 그렇게 말하면서도 몇 명의 할머니는 응했고, 그렇게 저자와 할머니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이 책은 일본군 성노예 사건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할머니들이 자신의 과거를 그림으로 드러내게 되는 과정을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다. 거리를 두는 건 아니다. 단지 조심스러울 뿐이다.
  상처 입은 사람과의 거리는 조심해서 조절해야 한다. 당신을 해하려는 게 아니라, 도와주려는 것임을, 시간으로 설명해야 한다.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할머니들의 마음을 열었고, 어떤 식으로 할머니들의 과거를 끄집어냈는지, 저자는 특별히 묘사하지 않았지만, 상상은 간다. 분명 저자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으리라.
 
  저자의 노력과, 할머니들의 호응 속에, 천천히 과거에서 벗어 나온다. 처음에는 무엇을 그리면 좋을지도 몰랐던 할머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과거를 화폭에 옮겨 담는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전시되었던 할머니들의 그림은 서글프고 씁쓸하다. 그래도 아주 슬프지는 않다.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던 과거를 직시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틀을 깬 사람 특유의 아우라가 넘실거리고 있기에.

  순조롭게 계속되던 수업은 병으로 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외에 여타 일이 겹치면서 결국 종료된다. 저자의 인생에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시간으로 기록되고 말았을 이 일화는, 2015년 일본과의 재협상 이후 책으로 만들어졌다. 피해자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협상을 저자는 용서할 수 없었기에.
 
  일본에서 있었던 전시회에서, 그곳에 방문한 일본 국민은 처참했던 자신의 과거를 외면하지 않았다고 한다. 적은 수일지라도. 그들이 기억해준다면, 끔찍했던 과거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겠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조만간 그때를 증언할 사람마저 사라지겠지. 쓰라린 기억이기에 외면하고 싶겠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잊지 말고 기억하자.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

  일본군 성노예 사건에 대해 알고 싶지만, 그 끔찍했던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 괜찮을 터. 관계자의 목소리가 녹아있지만, 직접적으로 들어가지는 않는 만큼, 그래도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을 터.
  아니 사실 부담스럽더라도 이런 책은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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