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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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물에 뜨는 이유는 물보다 가벼워서다. 물의 비중이 1인데 비해 얼음의 비중은 0.917. 얼음으로 이뤄진 빙산(氷山)도 같은 이유로 뜬다. 흔히 말하는 ‘빙산의 일각(一角)‘은 엄밀히 말하자면 0.083쯤인 셈이다.

‘사라진 것들‘을 표제작으로 하는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은 지식 예술계에서 생계를 꾸리는 40대 전후 남성 화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모래시계‘처럼 줄어드는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완만한 현재진행 수동태로 그려내고 있다.

‘인생이라는 빙산‘의 일각을 포착함으로써 그 아래의 구각을 상상하게 만드는, 단편의 힘이 살아있다. 우리가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린, 혹은 애당초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가 사라진 후에야 알아차린 것들이 모두 그 빙산 아래에 있을 것이다.

˝커피에서 와인으로 이동하는 시간˝에 담배를 태우고 알코올을 홀짝거리며 허무를 다독여 보지만 ˝더 큰 목적에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은 피할 수 없는 기본값이다. 급기야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 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다 우리 몸이 ˝갑작스럽고 불쾌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하다 못해 예기치 않은 병으로 ˝진정한 자아와 그에 조응하는 선택이나 행동˝마저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근본적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이 변화의 방향은 퇴조, 퇴락, 상실이다. 더 이상 첼로를 연주할 수 없게 된 첼리스트의 혼란과 좌절에 우리의 모습 또한 포개진다.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랐다가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 버렸다는 걸 깨달을 때˝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제 우리가 함께 하는 인생은 더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 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담배‘_<사라진 것들>

한편 외로움을 덜어준 관계가 가져다 준 유대감은 햇빛을 만난 거미줄 위의 이슬처럼 금새 증발해버린다. 사랑이나 우정, 책임감 등 무엇이라 이름 붙이건 관계에서 비롯된 그 무엇도 일상의 부대낌 속에 마모되며 어떤 균열을 낳는다. 그 틈새로 권태와 무력감, 불안과 질투, 허무와 좌절, 죄책감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언뜻 언뜻 고개를 쳐든다. 앤드루 포터의 세계에서 이런 감정들은 강렬한 원색보다는 한 풀 꺾인 파스텔톤에 가깝지만 그 그림자는 짙다.

이들 섬세한 화자의 연약함이나 간혹 위악적인 포즈는 매력적이지만 조금은 비겁하고 때로는 사치스러운 넋두리로 느껴지기도 한다.

본래 관계는 닻이자 덫이다. 타인의 온기가 주는 위로를 갈망하다가 관계로 인한 무게에 휘청이며 ‘타인은 지옥‘이라고 절망하는, 그렇게 양쪽을 오가는 진자 운동이 인생인 것 아닐까.

* * *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길을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짐은 멀리 던져버려도
어느새 다른 사람의 짐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짐의 절반 이상이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빛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정호승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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