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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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바다를 맛보기 위해 바닷물을 세숫대야째 들이킬 필요는 없다. 그저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OTT가 점화시킨 ‘빨리 감기’라는 영상콘텐츠 소비 행태를 통해 ‘요즘 시대, 요즘 세대’의 염도를 확인할 수 있는 한 방울 바닷물과 같다.

책이 포착한 순간은 제목이 설명하는 것처럼 단순명료하다. ‘언제부터인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보이는 것보다 많은 것을 시사한다.

1. 더 맵고 더 빠른, 자극 인플레이션의 시대

더 빨리 보면 더 많이 볼 수 있다. 효율이 최고의 덕목인 시대에 불가피한 변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므로 빨리 감기가 개인 단위에서는 새로운 습관이 되고, 세대 차원에서는 일종의 진화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강화된 것은 속도만이 아니다. 24시간, 전 세계로 연결되고, 더 많은 정보를 더 짧은 시간에 소화하는 사이 음식은 매워지고 음악의 표준음은 높아졌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닭볶음면의 스코빌 지수( 4400SHU∙맵기 측정 지수)는 신라면(2700SHU)의 1.6배에 달한다. 30여년 전 매운 맛을 표방하고 나선 국민 라면이 이제는 ‘순한 보통맛’이 되버렸다. (참고: 장강명 칼럼)

2. 디지털 네이티브의 감각

언젠가 큰 아이가 인터넷 기사에 단 자신의 댓글이 베스트에 뽑혔다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요즘 아이들은 본문보다 댓글을 먼저 보고, 상당한 빈도로 댓글만 본다는 걸 처음 알았다. 댓글창에서 본문 내용과 상관없는 ‘아무말대잔치’ 배틀이 종종 벌어지는 미스터리도 일부 풀렸다. 벌써 7-8년 전의 일이다.

넷플릭스가 TV외에 PC, 태블릿, 스마트폰에서 속도조절 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 외국어를 배우기 좋겠다 싶었는데 인터넷 강의로 단련된 요즘 세대는 이미 고배속이 기본이었단다.

이 자극의 진화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가속도의 효율이 가져오는 기술과 인간의 ‘공진화’ 시대에 치러야 할 댓가는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한 것일까. 좋아질수록 나빠지는 것도 있다는 역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책은 빨리 감기로 대표되는 영상소비의 양상과 원인, 현상의 맥락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다각도로 조명한다. 당초 기사로 출발한 화두를 책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을 자기복제, 동어반복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고 성실한 탐구가 돋보인다.

특히 빨리 감기를 파고 들면서 오독의 자유를 원치 않는 시청자(소비자)의 등장, 설명(대사)이 늘어난 ‘친절한’ 콘텐츠 증가 등의 현상을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다른 가지로 보면서 경기 침체와 인터넷 발달의 상호작용이 빚어낸 현상으로 분석한 것도 흥미로웠다.

‘사이다’ 전개를 선호하는 요즘 드라마 시청자들이 주인공이 오해를 받거나 고난을 겪는 ‘고구마’ 구간이 길어지면 미련 없이 중도 하차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지 모르겠다. ‘고구마‘ 없이는 ‘사이다‘도 그리 시원하지 않은데 말이다.

3. 돌이킬 수 없는 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세대보다 똑똑하고 다음 세대보다 현명하다고, 모든 세대가 자기 세대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조지 오웰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영화는 극장에서, TV는 안방에서 보고, 리모콘이 가정 내 의사결정권을 상징하던 시절을 경험한 세대다. 이제 스크린과 브라운관은 각각 영화와 드라마의 대명사라는 지위를 잃었고, 작품 감상과 콘텐츠 소비의 구별 없이 빨리 감겨지는 세태 속에서 예고편은 하이라이트와 경쟁하고 있다.

저자 역시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출발하지만 빨리 감기를 비롯해 연관된 현상을 비교적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조명한다. 저자의 취재와 관점을 통해 요즘 세대가 처한 상황과 심리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라는 걱정이 남는다. 자극이 강해질수록 피로감도 커질 것이다. 실패를 피하려 들수록 오히려 취약해질 것이다. 회복탄력성은 평균적으로 낮아질 것이다. 기술의 온실에서 제거된 것이 잡초만은 아니다. 애당초 무엇이 화초이고 잡초인지도 인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류일 뿐이다.

4. 책을 읽으면서 생겨난 질문들

손해보고 싶지 않다.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살면서 늘 당첨의 행운을 누릴 수는 없다. 대체로 ‘꽝’이 디폴트값인 것이 인생 아닐까. 여백이 그림을 만들고, 침묵이 말에 힘을 실어주고, 비계가 삼겹살을 삼겹살답게 만든다.

시간 가성비는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아낀 시간으로 무얼 하는가의 문제는 더욱 커진다. 아낀 시간으로 더 많은 영상/콘텐츠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마실수록 목마른 가상의 대리체험에 휩쓸리는 건 아닐까. 충분히 보는 것보다 빨리 더 많이 보는 것이 더 좋을까.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정보 습득을 위한 콘텐츠나 본격 시청 여부를 가늠하는 과정에서 빨리 감기나 발췌 영상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 너는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나에게 물어봤다.

다른 질문도 생겼다. 빨리 감기의 반대편에는 느리게 감기도 있을 터. 어떤 이들이 느리게 볼까 궁금해졌다. 문득 화면해설작가들이 쓴 책 <눈에 선하게>를 읽다가 만난 대목이 떠올랐다.

시각장애인 화면해설을 위해 영상을 0.3배속으로 몇 차례씩 돌려보며 원고를 완성했다는 이야기. 빨리 감기의 반대편에도 이처럼 여러 삶의 풍경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동차로 오가던 길을 어느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 새롭게 발견하는, KTX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감각과 풍경 같은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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