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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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읽다 보면 밑줄 긋기를 포기하게 된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눈부셨다”는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를 빌려보자면 “문장이 뜨거워서, 문장이 서늘해서, 문장이 예리해서” 줄을 치다 보면 나중엔 밑줄 없는 문장을 찾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까닭이다.

<인생의 역사>도 그렇다. 그의 문장을 통해 모르던 시를 만나고, “알던 시도 다시 겪으며”(8p) 새로 알게 된다. 백수광부의 아내, 베르톨트 브레히트, 최승자, 셰익스피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메리 올리버, 김시습, 윤동주, 황지우, 밥 딜런, 이성복 등 32편의 글에 등장하는 동서고금 시인들의 작품은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작가의 ‘번역’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그 시와 나 사이에 다리가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라만 보던 곳에 걸어들어가 맞닥뜨리는 풍경은 저 멀리서 바라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곳에서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변화의 시간이 시작된다. 작가의 말을 빌면 시란 ‘인간의 언어로 제기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질문’(87p)이 아닌가. 이 질문의 중심에서 나의 답을 찾는 일은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경험이다. 이 책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슬픔이 여기에 있다.

1.
프롤로그부터 강렬했다. 혁명시로 알고 있던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가 달라진 세상에서 강렬한 연애시로 읽히는 맥락을 지나, 브레히트의 연인 베를라우다의 이야기를 통과하며 ‘사랑의 부등식’을 증거하는 시가 된다. 작가는 여기에서 읽어낸 사랑의 태도에 ‘조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식으로 살다가 부모가 된 자신의 ‘자리 바꿈’에서 얻은 깨달음을 포개어 말한다.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으로 죽어도 죽지 않겠다고.

2.
금오신화의 작가, 김시습이라는 ‘장학퀴즈’에 등장할 법한 짧은 지식 말고, 옛 한시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강렬한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특히 “그 슬픔은 단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기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고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다” 는 언명은 아프다. ‘밖의 더러움으로 안의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한 제의’ 로서 또 한번 똥통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랬던 김시습이었기에 우리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가 가능했다니 그건 또 왜일까. “세계의 완강한 질서에…비타협의 결과로 패배하고 말지만, 그 순도 높은 패배가 오히려 주인공의 궁극적 승리가 되는 아이러니의 기록, 그것이 바로 소설”(120p)이라는 힌트 앞에서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법’을 마주하게 된다.

3.
W.H.오든의 시 ‘장례식 블루스’에서 시작하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읽은 때는, 어쩌자고 하필이면 2022년 10월 마지막주였다. ‘죽음을 세는 법’ 같은 건 더 이상 복습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 식으로 말하면 “158명이 죽었다는 것을 ‘158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158건 일어났다.’가 맞다.” 그리고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왜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4.
윌리스 스티븐스의 ‘아이스크림의 황제’는 새롭게 발견한 흥미로운 시였다. 거의 즉각적으로 마포구 염리동의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가 떠올랐다. ‘녹기 전에’의 박정수 대표가 몇몇 인터뷰에서 “아이스크림은 시계 이외에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라서 늘 열심히 살라는 조언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시였다. 역시 동서고금을 통틀어 진리는 통하고, 시인은 도처에 있다.

5.
윤동주,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176p)
하루는 7212 버스를 타고 오가며 보기만 하던 윤동주 문학관에, 일부러 하차해서 들러보았다.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윤동주 문학관은 본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가압장’이란 말은 처음 들어봤는데 찾아보니 수압을 높여서 고지대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시설을 뜻한다. 말하자면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인 셈이다. 신형철 작가가 ‘윤동주는 최후의 나를 향해 갔다’에서 “이제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어준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176p)˝라고 쓴 것을 보며 윤동주 문학관 자리를 떠올렸다.
“윤동주는 우리 영혼의 가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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