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들에게 던지는 치사하고 쪼잔한 질문들
김현민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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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벤트로 책을 제공받아 적는 감상임을 밝힙니다.

평범한 30대 남성의, 날것의 시선으로 들여다 보는 젠더 갈등 이야기

언젠가부터 젠더 갈등은 대한민국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올랐다. 사회적으로 무슨 일만 터지면 성별로 나누어져 서로 공격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페미니즘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누군가한테는 여성 인권의 신장을 위한 지상 최고의 가치이며, 누군가한테는 사회의 암적 존재를 키워내는 정신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후자와 같은 생각은 굉장히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지양해야겠지만, 저자와 마찬가지로 30대 초반 남성인 필자의 경험상 주변의 또래 남성 친구들은 대체로 페미니즘에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대놓고 비하까지는 안 할지라도 굳이 우호적으로 볼 이유도 없는 그런 것?

솔직히 밝히자면 필자 역시 페미니즘에 그리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순하게는 트위터 등지에서 대놓고 남성혐오를 하는 레디컬 페미들에대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되는 부분이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필자가 몇 권의 소위 페미니즘 서적을 통해 들여다 본 페미니즘의 논리가 굉장히 폐쇄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남성을 기득권으로, 여성을 약자로 규정하며 오직 여성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만' 역설하는 페미니즘은 일부 소재에서 유효한 지점이 있을지언정, 복잡한 세상을 오직 하나의 투쟁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모순들을 그저 '기득권의 저향'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는 편협합을 보여준다. 페미니즘이 사회를 바라보는 기능론적 관점을 도외시하고 오직 갈등론적 관점에만 천착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필자가 공감하는 이유다.

저자는 <82년생 김지영>, 여성할당제, 성매매, 설거지론 등 젠더갈등에 얽힌 주요 소재에 대한 스스로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친페미, 반페미를 막론하고 젠더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을 많이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으며, 위의 소재들은 이제 지겹다 못해 사골과 같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들에게 던지는 치사하고 쪼잔한 질문>을 한 번은 읽어보는 걸 추천하는 것은 저자의 기본 관점이 이론이나 정치가 아닌 '진화'나 '번식'과 같은 인간 본성에 관한 부분에 방점을 두고 있으며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성찰해 볼 지점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82년생 김지영> 등으로 촉발된 페미니즘 열풍 및 젠더 갈등은 여성이 그간 겪어야 했던 불행을 재조명하고 남성의 가해자성을 부각시킨다는 점,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일부 남성들 역시 군대 등의 스스로의 불행을 강조하며 역차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행 배틀'의 성격이 다분하다. 사실 이런 불행 배틀은 저자의 말마따나 일률적 비교가 굉장히 곤란하다. 임신, 군대, 경력단절 이니 뭐니 해도 사람마다 느끼는 바도 다른 것이고, 애초에 딱 통일된 지표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고와닿다 보니 남의 고통에 잘 공감하기 어렵고 그런 지점에서 겪은 감정적 서운함이 등이 쌓여서 지금의 불행 배틀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싶다. 불행 배틀의 끝은 결국 참가자 모두의 불행일 뿐일 것이다.

저자는 많은 이들이 겪는 내면적 불행의 근원을 오랜 세월 동안 구조적, 문화적으로 고착화된 전통적 성역할과 현대사회의 현실적 여건의 불일치에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강함과 진취성, 좀 더 현대적으로는 막강한 경제력 등이 남성에게 기대되는 덕목이며 남성은 평균적으로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대다수의 남성들은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반대로 조신함과 온화함, 순결함 등이 여성에게 기대되는 전통적인 덕목이었지만 이는 능력있는 여성들의 진취를 막는 기제로도 작용하였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코드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강해지는 듯 하다.

전통적 성역할의 고착화를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전통적인 여성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와 일견 통하는 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진화의 끝에 선택된 남성과 여성의 유전적 본성을 무시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신체적으로 강인하다는 특성, 남성은 어디서나 비교적 쉽게 스스로의 씨를 뿌리고 다닐 수 있는 반면, 여성의 난자는 그 생성에 남성에 비해 제약이 크며 임신 및 출산이 몸에 부담이 많이 된다는 특성. 그러다 보니 남성들은 자연적으로 속칭 상위 티어가 아니면 번식하지 못 하고 도태되어 왔으며 그런 오랜 세월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타고난 남성과 여성의 본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일례로 저자는 주식 투자 스타일 등의 통계 자료를 인용하며, 남성이 여성에 비해 좀 더 위험선호적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보다 심층적으로는,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 등을 근거로 고안되는 여성할당제가 이런 성별 간 위험 선호도 차이 등의 변수를 누락하고 입안될 경우의 피해를 경고하기도 한다. 단순히 기업이 여성을 차별해서가 아닌, 대기업 임원까지 가는 여정에 있어서 겪어야 할 수많은 위험을 감당하고자 하는 의지의 성별 간 차이가 대기업 내 낮은 여성 임원 비율의 원인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힌 수치의 단순 비교를 통한 차별의 성토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성별 간 차이를 들여다 보자는 것이다.

저자가 제기하는 성별 간 차이 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남성의 성욕이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강하다'라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연애, 소개팅 등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왔을 때 남자들은 기꺼이 더 많은 금전적 부담을 지고자 하며, 거시적으로는 남성이 여성보다 위험선호적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높은 성취를 이루어 아름다운 여성들을 거느리자'라는 유전적 본능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일본의 버블 붕괴로 시작된 불경기에 등장한 소위 초식남들이 사회적 성취에 무관심해진 이유 역시 결혼 시장에서 보다 나은 매력을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물론 남성이 성욕만으로 움직이는 존재는 당연히 아니겠지만, 성욕이 인간 보편의 욕구라는 점에서 성욕이라는 누군가한테는 조금 불쾌할 수 있는 지점을 과감하게 집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남성의 성욕이 여성의 그것에 비해 훨씬 강하며 행동 동기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 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의 성욕을 일견 '무절제한 것'으로 간주하며 적대시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n번방 사건 등으로부터 더욱 강력하게 촉발된 '모든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다'라는 슬로건 역시 '남성의 무절제한 성욕'애 대한 혐오가 밑바탕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 통념상 연애를 하는 데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행동은 보통 남자가 취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서로 오해하고 상처를 주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 등으로 불리는 범죄 행위야 당연히 엄격히 근절되어야 하지만, 지극히 개인사적인 부분이 법으로 잘못 걸려서 처벌될 가능성 역시 과거에 비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 비해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렵고 이성을 유혹하는 과정에서의 리스크가 커진 상황. 이런 속에서 나온 게 '설거지론'이다. 저자는 자신이 과거 출연한 바 있는 '나는 솔로다' 프로그램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고백 등의 과감한 리액션을 취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는, 다시 말해 가능성 낮은 이성에게 배팅하지 않는 남성의 비율이 늘어났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를 남성이 전통적 성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점에서 일견 긍정적으로 보는 듯 하다. 분명 그런 지점도 있을 것이다. 다만 성욕이 그토록 강한 남성이 이성을 유혹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것에 이전처럼 적극적이지 않다면 성욕을 풀 대체안이 필요한데, 그 중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사회적 소재가 성매매 일 것이다. 저자는 성매매를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을 소개하며 성매매 합법화가 남성과 여성의 행복의 총량을 증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핸 논한다. 필자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본 지점인데, 성매매 시장을 건조하게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본 것이 좋았다. 아무래도 '성'에 대한 과도한 신성시 및 보수적 관점이 개입되면 사안을 제대로 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다만, 저자는 성매매 합법화 필요성에 대해 모르겠다고 결론을 내린다. 솔직히 고백하면 필자는 과거에는 성매매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바라보았지만, 현재는 성에 대한 터부시를 줄여가면서 양성화를 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남성의 성욕 해소를 위한 차원뿐만 아니라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 쪽에 종사하는 이에 대해 보다 제대로 된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양성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성문화로는 성진국이라 불릴 만큼 개방적인 일본과 달리, 합법적인 연애 및 결혼이라는 루트 이외의 성욕 해소를 죄악시하는 한국적 풍토에서는 성욕 해소를 위한 루트를 찾지 못한 남성들이 설거지론에 잉태된 기존 관념에서의 탈피를 이루지 못하고 회귀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 필자는 이 지점은 조금 회의적이다. 일단 설거지론의 근원을 따져 보자면 '스스로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성취를 이루지 못한 비루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일정한 부분을 차지한다 할지라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보다 스스로의 삶의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의 변화라던가 그 외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꼭 성매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도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성인웹툰, 성인소설 등 철저히 성욕해소에 초점을 둔 컨텐츠들이 발전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음지 문화일지 어떨지 모르지만 탑툰, 노벨피아 등의 약진에서 알 수 있듯 그 시장성은 꾸준히 증명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남성과 여성의 본성적 차이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다 보니 성욕에 초점을 둔 것이겠지만, 설거지론에서 시작된 태동이 단순히 성욕 해소의 대체안 모색 실패라는 이유로 좌초될 것이라는 건 남성을 너무 일률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와 별개로 남성의 무분별한 성욕 억제 등의 여러 미사여구를 통해 러브돌 등의 도구 수입까지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행태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한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통해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욕이 강한지 어떤지를 떠나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데,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이념을 가진 많은 이들은 '강제로라도 상대를 바꿔야 한다'라는 생각에 경도된 경우가 많다. 페미니스트가 사실 딱 그런 경우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여러 논의 끝에 저자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여자던 남자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는 페미니스트가 될 이유가 크게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분명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남녀의 사고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람에게 각인된 본성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누군가에 대한 증오나 미움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이 요지다.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기득권으로 상정한 남성이라는 집단에 대한 적개심을 기반으로 움직이며 이 지점이 결국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필자는 완벽하게 동의한다. 다만, 남녀의 본성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연애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인용하여 논리를 전개하는데, 필자의 연애 경험이 일천해서인지 모르지만 남녀의 사고방식이 변화해감에 따라 사회 통념상으로 굳어진 연애 관습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은 근 100년간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국가 중 하나일 것이며, 이 속칭 젠더 갈등이라는 게 부상한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여러 과정을 겪으며 소위 남성성, 여성성 이라는 게 형성되어 왔듯 지금 그 규범이 나름대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녀의 본성에 초점을 둔 관점도 하나의 의견으로서 당연히 필요하고 성찰할 지점이 있지만, 지나치게 그 곳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결국 '어차피 남자는~, 어차피 여자는~'와 같은 구태적 주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이런 모든 논의 끝에 결국 젠더 갈등에 몰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갈등 장사꾼의 배를 불려줄 뿐이고, 나가서 사랑받고 젊음을 즐기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본인 역시 이 젠더 갈등을 이용해 돈을 번 수혜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꼭 젠더 갈등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갈등 및 증오에만 몰입해서 좋을 것은 당연히 없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젠더 갈등은 사회에 엄연힌 존재하는 현상이고 자신의 일상과 연결될 수도 있는 사안인 만큼 관심을 끈을 놓지 않는 것은 필요하다 생각하며, 그렇기에 저자 스스로가 제목에서 '치사하고 쪼잔하다'고 말한 질문들을 던지는 이 책 역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저자의 모든 논지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양 성별의 솔직한 의견을 담은 책들이 많이 나와서 서로의 보다 나은 이해를 도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여 본다.

다시금 좋은 책을 기꺼이 보내주신 저자 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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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나비클럽 소설선
민지형 지음 / 나비클럽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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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회한 나의 전 여친이자 첫사랑이 메갈이 되어 있었다!



시놉시스부터 정말 도발적이고 흥미롭다.

메갈. 92년생인 나의 주변 또래 남자들 사이에서는 대충 '꼴페미'랑 유사한 의미의 용어 정도로 사용되는 느낌이고, 결코 좋은 뉘앙스는 없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메갈이 되었고, 그 사람과 연애를 한다....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구도다.



책을 읽기 전 관련 리뷰들을 10~20개 정도 찾아 보았다.

대체로 메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레디컬 페미니스트의 표상 정도라 할 수 있는 여주에 이입하고

한남의 표상인 남주를 욕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구매자의 다수가 2030 여성인 만큼 이런 반응은 예상한 바였다.

그렇다면 메갈이 말하는 속칭 한남에 해당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인터넷 상 지인의 추천에 더하여 위와 같은 흥미가 이 책을 손에 잡은 이유였다.



일단 남주 승준은 요즘 기준에서 볼 때 상당히 가부장적인 집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한 인물로 보인다.

그 또래 평범한 남성답게(?) 페미니즘, 메갈 등에 단어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집안의 영향인가 일부 사고방식이 굉장히 고루한 부분이 있고, 일부 지점에서 눈치가 다소 떨어져 보인다.



여주는 짧은 머리에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성범죄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매사에 다소 까칠한,

전형적인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다.

맨스플레인 같은 페미니즘 특유의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게 현실성을 높여준다.



일단 책을 다 읽고 30분도 채 안 된 현 시점에서는 일방적으로 한 쪽을 칭찬하거나 욕하기는 어렵다.

승준은 아마 항상 칭찬받고 승승장구하며 딱 정해진 루트를 밟아온 것으로 추정되고,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순진한 구석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고.

젠더 이슈에 너무 무지하다 보니, 여친이 성범죄 관련 기사를 말하며 열변을 토할 때 무고죄 어쩌고 이야기를 하고, 비혼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 같은 좋은 남자 만나면 결혼 생각 나지 않겠어 같은 소리를 할 때 입 좀 막고 싶었다.

그리고 낙태죄 같은 이슈에 대한 태도에서 그가 동세대 남자들의 기준에서도(승준은 나랑 비슷한 또래로 설정됨)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나는 낙태죄 폐지에 절대찬성하는 쪽이다), 특히 노콘 섹스해서 여친 임신시키면 결혼 가능ㅋ? 같은 망상을 하는 일련의 대목들은 남자라도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승준은 여친을 대하는 데 있어 자기 나름대로는 진심이었고, 폭력 등의 범죄행위를 저지르지도 않는다.

생각이 좀 일부 고루해 보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기준에서' 여친을 잘 대하고자 애쓴다. 밤늦게 걱정되니까 데릴러 간다던가, 무거운 들 때 도와준다던가, 돈 좀 대신 내주려 한다던가, 특히 여친이 성희롱 사건에 엮이며 퇴사를 결정할 때는 진심으로 그녀를 뒷받침하고자 한다.

결혼을 은연 중에 강요하는 집안의 분위기에 짓눌리고 이에 반감을 가지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가진 가치관을 바꾸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는, 현 시대 기준에서 구식 가치관을 지닌 집안에서 자란 남성 나름의 고독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친(이름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여친으로 명명한다)은 아마 과거 승준과 헤어진 이후 겪은 여러 성희롱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해, 소설의 용어를 빌리면 메갈, 정확히 말하면 레디컬 페미니스트가 된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이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는 사회를 바꾸고 싶어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구세대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집안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자취를 하고 있다.

그러다가 승준과 메갈 집회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그녀는소설의 표현을 이용하면 승준의 안에 내재된 한남성을 알기에 다시 사귀자는 승준의 제안에 망설이지만, 승준이 워낙 강렬하게 대시하기도 하고 본인도 과거 승준한테 좋은 감정이 있던 만큼 '너가 나가떨어지면 100만원 줘'라는 좀 우스꽝스러운 조건을 걸고 사귀기 시작한다.



솔직히 이 지점부터 연애가 잘 굴러가지 않을 거라는 게 보인다.

나 자신이 연애 경험이 딱히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연애는 서로 맞춰가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여친은 자신의 가치관을, 그것도 승준이 전혀 공감하지 않는 가치관을 절대로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승준에게 '너가 맞춰. 싫으면 말고'라는 태도를 고수하며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연애가 잘 끝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둘의 서로 좋아하는 감정 자체는 진짜였기에 둘은 관계를 가지기도 하고 나름대로 잘 지내간다.

하지만, 여친의 관점에서 보이는 승준의 한남성

동시에 승준의 관점에서는 매사에 지나치게 까칠한 여친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이는 결국 둘이 함께 참가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승준의 친구와 여친 사이에 언쟁이 나며 폭발해 버린다.



중반부까지는 승준과 여친 사이의

악의가 없었음에도 서로의 가치관과 시야에 따라 발생하는 갈등을 나름 현실감 있게 잘 보여주었다 생각한다.

그런데 최후반부 친구의 결혼식 파트부터는 거부감이 심하게 들었다.



대관절 친구 결혼식 가서 친지들끼리 저따위로 언쟁하는 것부터가 좀 억지 같고...

아니 축하하러 간 자리에서 서로 무례한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지를 않나...

승준의 친구나 여친이나 잘한 거 하나도 없다.

남의 결혼식 가서 분위기나 망친 매너 없는 것들 뿐이다.

승준이 귀가길에 여친에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여친은 '너가 뭘 그렇게 노력했냐?'며 되려 화를 낸다.

물론 승준이 '너 그러다 독거노인으로 죽는다.','니네 부모님이 이혼해서' 같은 막말을 욱한 김에 내뱉은 건 잘못이지만, 여친의 '나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고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일을 강요하는 승준과 세상이 문제야'라는 고고한 자세는,

그리고 승준과 여친의 이별에서 승준이 마치 여친에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것처럼 말하게 하는 전개는 진심으로 짜증스러웠다. 그 와중에 승준은 또 여친을 걱정하고... 후

여친의 캐릭터는 페미니스트가 어째서 그렇게 전투적인지, 동시에 왜 많은 이들, 특히 남성들로부터 경원시되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여친은 사회에서 여러 여성 차별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받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투신으로 이어진다.

여성으로서의 피해서사, 한남에 대한 분노 및 혐오.

여친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위의 두 요소를 핵심동력으로 운동을 지속하였을 것이다.



피해의식과 분노가 바탕이 되면 운동은 투쟁이 된다.

투쟁은 본질적으로 상대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차단한다. 상대는 부숴야 할 존재가 되니까.

스스로가 피해자이기에 타인의 고통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어진다.

그래서일까? 여주는 승준의 배경, 생각, 고민 등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승준이 하는 행동에 언짢음을 표시하고, 스스로의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열을 올리고, 막판에는 승준의 모든 노력을 부정해 버린다.

'설명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은 설명해도 모르는 것이다'

여친이 뭔가 있어 보이느 것처럼 마지막 이 문장은 k페미니즘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이다.

우리는 너희들을 설득해서 이해시킬 생각은 없어. 그냥 우리의 말이 옳아 라는 독선 의식.



상대가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별 관심이 없음에도 특정 주제를 계속해서 강요하는 것은 무례다.

여친은 승준이 뻔히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굉장히 반복적으로 페미니스트 티셔츠 입기, 페미 서적 읽기를 자꾸 권유한다.

승준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책은 읽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런데 여친은 뭘 했지?



개인적 경험담이 나오게 되는데 과거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리뷰를 보다 보면

'남자들이 책 읽지도 않고 별점테러한다'

'남자들한테 이 책을 읽혀야 하는데'

이 같은 말들이 자주 보인다.



이 말부터가 오만 방자함의 끝이다.

한남들은 기본적으로 멍청한 존재라 그냥 불합리한 페미에 대한 증오심으로 별테나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서적을 보면 바뀔 것이고 바뀌어야 하며, 안 그러면 답이 없는 존재다. 라는 것

사람을 얼마나 우습고 쉽게 보는 걸까?

사람은 좋게도 나쁘게도 쉽게 바뀌지 않는 존재다.

여친이 승준의 시점에서 평범한 여자에서 페미니스트가 되기까지 4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가 되엇듯

승준이 변하는 데도 시간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변하지 못 할 수도 있고.

그런데 여친은 승준을 변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숨 쉬지만

가끔 언쟁하는 거랑 책 읽고 티셔츠 입으라고 권유 좀 한 거 말고 여친이 한 게 뭐가 있나?

아마 위의 설명 어쩌고 운운한 대사에 함의되듯 여친은 애초에 승준의 변화 가능성을 보지 않았을 거 같다.

그냥 본인도 사람이 그리우니까, 승준이 워낙 대시하니까 만나보고는 싶은 건데, 가치관을 바꿀 생각은 없고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은 자유이나, 일단 연인 관계를 스타트했으면 승준에 대한 존중을 조금은 더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까칠한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일리 있는 말일 수 있다.

다만 방식으로 피해의식과 분노로 무장된 투쟁을 선택하였다면 그 후과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위터 등의 화력을 이용한 투쟁은 단기적으로는 분명 대중의 관심을 높인다.

실제로 그로 인해 환기된 여성 차별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강경한 공격은 장기적으로 증오를 생산한다.

초반에 승준이 자신이면 메갈을 치료할 수 있어 같은 소리 하는데

내 주변 보면 이런 생각 잘 안 하는 것 같다. 그냥 손절해야 한다 같은 말이나 하지.

여친은 잠재적 가해자와 같은 표현에 언짢아 하는 승준에 대하여

'그러면 피해자 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 없애면 되겠네'라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그 세상이 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죄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소리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이에게 그리 합리적으로 들리겠나?

한남을 여성 차별 이야기 하는데 무고죄, 군대 이야기나 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는데,

남자들이 겪는 엄연한 고통인 군 문제에 대한 공감을 표시할 생각이 1도 없으면서 자신에 대한 공감을 바라는 것은

솔직히 바보 같기도 하고 뻔뻔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여친이 악인은 아닐 것이다.

그냥 자신이 겪은 경험이 너무 아파서,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호소에 너무 차가워서,

그렇게 변했을 것이다.

그런데 승준이 의도를 가지고 여친을 상처입히는 것이 아니듯,

페미니스트들의 표현에 많은 한국 남성들이 상처받는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의 속사정이나 의도와 무관하다.

본인들이 의도야 어찌되었던 그런 전략을 택한 이상 그 후과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 본다.

벌써 대선 후보 1명이 무고죄 강화를 입에 담고 있고, 반페미를 외치는 당대표가 나온 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승준과 여친의 연애담 자체는 어찌 보면 가치관 차이로 헤어지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작가가 은연 중에 정당화하는 여친의 캐릭터성과 승준으로 대표되는 남성에 대한 몰이해가

이미 다른 페미니즘 서적에서 느낀 한계점임에도 또 느껴져서 짜증이 배가된 느낌이다.



시놉시스가 워낙 신박했고

중반부까지 은근히 현실적인 서로의 사고 과정 묘사로 몰입이 잘 되었지만

어느 순간 여친에 대한 무조건적 정당화가 보여서 거북했던 소설.

거기에 이 책의 여친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승준을 그저 욕하기만 하는 리뷰들이 그 거북함을 배가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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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 - 왜 평범해 보이는 남성도 여성 혐오에 빠지는가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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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저자가 사회 도처에 있는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를 비판하며 기존 남성성으로부터의 탈각 및 남성들의 페미니즘 운동 연대를 호소하는 에세이집이다.

여성들이 취업상에서 겪는 차별, 최근 있었던 정치인 성추문에서 행해진 2차 가해, 여성들의 높아진 의식 수준에 비해 더딘 사회 변화로 인한 젊은 여성들의 자살율 증가 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특히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및 '피해자에게 실명/얼굴을 공개할 것을 강요하며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 피해자들이 더욱 나서기 어렵게 만든다'와 같은 저자의 지적은 내가 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라 공부가 되었다.

다만 동시에 저자를 통하여 소위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도 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 에세이를 표방해서일까? 상당히 폭넓은 최근 사회 이슈를 다루면서 그 모든 것을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 및 여성혐오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려 하는데 분명 그게 맞는 부분도 있겠지만, 리얼돌, 게임, 개인방송 등 제법 많은 부분에서 지나치게 경직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리얼돌 자체의 존재 양태가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 관념 및 강간 문화의 체현'이기에 리얼돌 수입을 반대한다는 저자의 논지는 궁극적으로 현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 검열적 태도와 직결되는 부분이기에 수용하기 어려웠다. 형태를 막론하고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으며 혼자 즐기는 요소가 검열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건 그리 좋은 사고방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본인이 페미니스트로서는 출신성분상 약점(?)을 가지는 남성이기에, 남성들에게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에 맞추어 특권을 버리고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동참할 것을 권한다. 그런데 저자는 20대 남성이 페미니즘적 가치를 수용하고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조금씩 말하면서도, 자꾸만 '나는 아니야'라는 식으로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개탄스럽다는 둥의 서술을 반복한다. 저자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면 '속죄 의식'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속죄가 남성으로서의 스스로를 비판하고 죄책감에서 기인한 조신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잣대를 정하고 선을 긋지 말고 좀 더 많은 남자 페미니스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을 낸다. 그런데 젊은 남성이 많이 즐기는 게임, 야동, 인터넷 방송 등의 요소를 전부 '여성 혐오'라고 싸잡아서 비판하고 젊은 남성이 아직 사회 경험이 없어서 여성 차별을 보기 어려웠고 '일부' 극렬 페미니스트의 인터넷 공격을 직격으로 받을 때라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는 식의 다분히 얕보는(?) 느낌의 글을 쓰면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선을 긋고 싶지 않다는 것은 모순 아닐까?

전체적으로 필자가 잘 몰랐던 여러 이슈 및 페미니스트의 생각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모든 것을 구조적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성차별에 대해 아직 큰 부채 의식이 없을 젊은 남성에게까지 '일단 반성해'라는 식의 속죄를 강요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사고방식과 화법의 한계도 잘 볼 수 있었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 준동을 부리는 속칭 꼴페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저 일부의 활동' 뿐이라고 넘기거나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 등 스스로가 속한 진영에 대한 반성을 전혀 볼 수 없다는 다른 페미니즘 서적과의 공통점을 여기서도 볼 수 있어서 아쉬웠다. 20대 남성이 페미니즘적 가치를 어느 정도 내면화한 세대라는 걸 인정하는데, 20대 남성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가진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메갈리안에 빚을 졌는데 그 메갈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오염됬다? 이런 건 최소한 홍보 차원에 있어서는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을 텐데 이런 점에서 그저 남성 권력 구조의 탓만 하는 것은 확실히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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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한일전 - 동아시아 신냉전 시대에 마주한 결정과 갈등과 대립의 순간들
길윤형 지음 / 생각의힘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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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잊혀진 감이 있지만, 2017년~2019년은 바야흐로 외교적 격랑의 시대였다. 2017년 북한의 ICBM 발사 및 김정은과 트럼프의 대립각, 2018년~2019년의 갑작스런 분위기 반전과 미북정상회담과 그 좌초 2019년 중반에 터진 일본과의 무역분쟁. 그 순간에는 잘 알기 어려우나 이런 일련의 사건을 이어 보면 하나의 스토리가 되기 마련이다. 본서 신냉전 한일전은 그 약 3년 간의 외교적 흐름을 한국, 북한, 미국, 일본을 중심으로 복기한 책이다. 필자의 호오와 무관하게 정신 없이 사건이 터지던 2017~2019년의 외교적 흐름을 존 볼턴의 회고록 등의 참고문헌 인용을 곁들여 복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었다고 본다.

저자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 정책 실패 원인을 두 가지 정도로 보는 듯 하다. 첫째는 임기 내에 어떻게던 획기적인 대북 외교 성과를 만들겠다는 목표 의식에 젖은 성급함, 둘째는 (그것이 의도되었건 아니건) 일본 패싱 및 그로 인한 일본의 반발. 덧붙여 일본에 대항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지소미아 탈퇴 선언 등의 전술 실패.

현 정부는 남북 평화 관게 조성이라는 의지가 워낙에 강하였고 한반도 중재자론을 내세우며 미국과 북한의 외교적 화해를 이끌어내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진짜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과 북한에 대하여 레버리지가 있어야 했는데, 장밋빛 기대를 품게 했던 2018년의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현 정부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고 이로 인해 정작 한국이 패싱되어 버리며, 미국과 북한은 서로의 현실 인식이 달랐기에 파국에 이르렀다는 것이 큰 흐름으로 보인다. 임기 안에 승부를 보려고 성급하게 드라이브를 건 것이 패착으로 보인다.

또한 저자인 길윤형 기자가 (필자의 관점에서는) 절대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리한 한일 외교 흐름을 볼 때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지나치게 무시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위안부 합의나 징용공 문제, 그리고 한반도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의 우려에 대해 명확한 답을 계속 주지 않은 것이다. 특히 2019년 초 문재인 대통령의 담화에서 NHK 기자가 한 질문에 대해 '너희는 가해자국인 만큼 마땅히 반성하는 자세로 있고 재촉하지 마라' 정도의 답은 당시에도 화제가 됬던지라 기억에 남는다. 물론 2019년 중순에 일본 정부가 실시한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잘한 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여기까지 이르게 했고 동시에 이후에도 감정적인 대응을 일삼은 한국 정부의 대응 역시 칭찬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를 밝혀 보면 위의 전술적 패착 이전에 한반도 중재자론 이라는 전략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저자는 거시적 전략 자체는 옳았으나 성급함 및 일본의 방해 공작 등으로 이게 와해되었다 보는 것 같은데, 애초에 목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다.

결국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미북정상회담 및 미북 관계 정상화를 이루어내고, 제재 해제 등을 통하여 북한에 경제 성장의 길을 열어주고 평화적 관계를 구축하여 종국적으로 북한의 핵을 폐기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통일을 이룬다. 대략 이 정도를 목표로 설정한 것이라 가정해본다.

일단 북한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신뢰할 수 없다고 그저 거부하기만 하면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수십 년 전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북한이다. 그 이후에도 각종 도발행위를 이어왔다. 그런 북한과 덜컥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한다고 하여 무언가가 크게 바뀔까? 북핵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요식적으로라도 천안함 책임자를 처벌하는 등의 어떠한 액션도 없이 그저 평화 협정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베트남에서 평화협정이 이루어진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솔직히 북한에 대한 신뢰도가 아직 부족하다는 점에서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도 필자는 좀 시큰둥했었던 기억이 난다. 협정이 되었건 뭐가 되었건 결국 상대가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담보되어야 의미가 있는 건데 애석하게도 필자는 북한을 믿기가 어렵다.

또한 비단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한국과 일본을 사정거리에 둘 수 있는 미사일이 남는다. 북한은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메우기 위해 비단 핵무기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생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이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한국과 미국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걸 저자는 일본의 '방해'라고 묘사하는데, 사실 지리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미국보다는 일본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이 한국 아닌가? 일본을 타격할 수 있으면 당연하게도 한국도 타격할 수 있다. 당연히 북한이 가지는 수많은 위험성을 면밀히 계산하여 움직여야 하는데, 이런 염려마저도 그저 '통일을 위한 발걸음'에 대해 방해가 되는 정도로만 보는 인식은 동의할 수 없다.

애초에 한반도 중재자론이라는 명칭 자체가 다소 모순적이다. 중재라는 건 이해관계에 비교적 얽매이지 않은 자가 갈등을 빚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를 원만하게 이끌어주는 걸 의미한다. 러일 전쟁 당시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한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런데도 합의 그 자체에만 목을 메며 위에서 제시한 이해관게에 눈을 감는 듯한 모습은 중재와 당사자라는 단어 그 자체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통일을 한다고 할 때 무슨 이득이 있는지에 대한 합의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통일에 대한 장밋빛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은 있으나, 실제로 통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그런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필자가 살아있는 동안은 너무나 다른 두 사회가 합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을 통째로 떠안아야 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계산은 다 무시하고 그저 민족적 감성으로 통일을 부르짖는 것은 국가의 이해관계보다도 감성을 앞세운 것이라 여겨져 동의하기 어려웠다.

길윤형 기자의 본인의 기억 및 다양한 참고문헌을 활용한 복기는 그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중재자론이라는 대 전략 자체에 대한 암묵적 긍정을 보며 언젠가 길윤형 작가가 방송에서 일본을 '반통일 세력' 정도로 묘사한 것을 다시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재미와 씁쓸함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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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cjoh 2021-08-2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미북중이고, 북한 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이 이미 몇차례 검토했던 미국의 전쟁재개이다. 그경우 피해가 불가피한 남한은 부수적임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남한은 주체가 아닌 중재자가 맞다고 본다.
박근혜의 위안부합의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외교적 합의를 후속정권이 과연 뒤집을수 있을까
 
다정한 무관심 - 함께 살기 위한 개인주의 연습
한승혜 지음 / 사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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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한 무관심은 일상 속의 사례들을 통하여 개인주의를 역설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에서 '개인주의'라는 용어가 이기주의와 유사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용어로 오용되는 것을 지적하고, 이는 그만큼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에 찌들었다는 방증이라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주의는 '평소에는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고 존중하나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 때는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것', 다시 말해 '다정한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겪은 일들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도사리는 개인에 대한 무시들을 찾아내고 이를 시정해야 할 것을 어렵지 않은 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선을 지키되 연대의 가능성을 놓지 말자는 저자의 메시지는 충분히 공감이 갔다. 과거에 많이 좋아졌음에도 한국 사회 자체가 워낙에 빠름을 추구하며 서로에 눈치를 많이 주는 문화다 보니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에 대한 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저자는 일상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차별과 몰이해를 제시하며, 스스로의 말에는 좀 더 조심을 하고 남이 처한 상황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가질 것을, 무엇보다 상대를 여성이네 주부네 하는 어떤 카테고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봐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저자가 60년대 후반생 여성으로서 한국에서 겪은 재취업의 문제, '여자라서 안 되' 같은 무례한 언행. 또는 무례한 택배 기사나 택시 기사를 보며 짜증을 내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들 역시 큰 비애가 있다는 일화 등은 기억에 남는다. 특히 상대가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농담이에요' 하고 넘어가는 것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말은 필자도 항상 생각하던 내용이기에 공감이 갔다. 스스로가 어떤 의도로 말을 했던 상대가 그를 무례하다고 받아들였다면 우선 상대의 불평을 제대로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솔직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는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밝혔을 때의 사회적 낙인을 알면서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소개한다고 서문에서부터 밝힌다.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을 그저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라 말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을 넘어 소수자의 권리를 찾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근래 화제가 되는 속칭 꼴페미,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화여대 트렌스젠더 입학 거부 사태 같은 극단에는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 밝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페미니즘에 대한 비방은 '사회에서는 언제나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이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런 이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논법과 무엇이 다른가?'하며 옳지 않다고 말한다.

최근 페미니즘에 우호적이라 밝히는 분들의 책을 몇 권 볼 때 느껴지는 위화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사상이자 운동이다. 사회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사상은 그 자체의 논리도 중요하겠지만, 그게 사회에서 실제로 발현될 때 어떤 모습을 취하는지도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실패한 공산주의도 구호 자체는 아름다웠으나 현실에서는 가난과 잔혹한 독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공산주의에서 일부 극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방향이 좋은 이념인만큼 비방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이는 극단적인 비교이긴 하다. 다만 해당 사상 자체가 선의를 품고 시작했다는 것이, 그 사상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부작용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지금 일베, 오유 등의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가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받는 것은 어째서인가? 비율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별다른 활동 없이 그저 재미로 해당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이들이 더 다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커뮤니티의 흐름을 이끄는 이들이 극단적이고 그들이 과대대표되는 것이 정제가 안 되니까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것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의 시작이 어쨌건 그것이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그리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비판받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반론은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페미니즘은 좋은 운동이야'라는 수준의 원론적인 답변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답변은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성에 기반한 것이기에 비겁하게까지 느껴진다. '기업에서 숏컷이면 페미냐며 묻는 세태'라고 한탄하는데 애초에 그 원인 제공을 누가 했는지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페미니스트 특유의 성차별적인 서술이 몇 군데 나타난 것은 저자가 최소한 성별 문제에 한해서는 본인이 부르짖는 '다정한 무관심'을 그리 잘 실천하지는 못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본인이 겪은 고용 문제나 성차별적 발언 같은 건 괜찮았다. 그런데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을 품평하는 저급한 농담에 대해서 비판을 하더니, '자신은 딸의 성장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 여자처럼 크면 된다. 하지만 아들이 어느 순간 바깥의 (저급한) 남성 문화에 물들까봐 걱정이 된다'라는 언급까지 나온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을 품은 이가 아들과 딸을 정말 평등하게 대할지 개인적으로는 좀 의심스럽다. 아니 딸이 공주님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면 딸이 '고전 동화에 나오는 수동적 여성상'을 학습할까봐 솔직히 염려되었다 는 말을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딸에게 '저자 자신이 원하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학습시킬지도 모르겠다. 알게 모르게.

이성을 저급한 언어로 품평하는 것이나 또래집단의 부정적 문화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은연 중에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남성에게 몰아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데이트 폭력으로 신체적 위험을 느끼는 여성이 다수고 남성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기에 기계적 중립을 지키면 여성이 실제적으로 느끼는 위험이 축소된다고 하는데, 이는 동시에 그게 소수일지언정 일부 남성이 젠더 문제에서 느끼는 고통은 '별 것 아니다'로 치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역시 '다정한 무관심'은 아닐 것이다.

정리하면, 저자가 서문에 걸어놓은 메시지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젠더 문제 관련한 일부 언급에서 본인 역시 '다정한 무관심'을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한다는 걸 증명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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