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여름 캐드펠 시리즈 18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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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권은 이제까지의 캐드펠 시리즈와 사뭇 다른 배경과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이제는 익숙해진 시루즈베리 수도원과 마을의 풍경, 익숙해진 이름들에서 벗어나 낯선 땅 웨일즈로 들어선 캐드펠의 휴가 여정은 다소 생소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캐드펠은 자신이 수사를 펴나가고 사건을 해결하는 입장이 아니라 철저히 관찰자 입장에 머물고 있다. 그런 점 때문인지, 솔직히 초반부에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반란의 여름'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웨일즈의 황야와 성에 대한 묘사에는 따듯한 애정이 깃들어 있고, 어딘가 먼 전설 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아름답고 강한, 그러면서도 소박한 군주와 젊은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잔잔한 즐거움이다. 언제나 그랬듯, 캐드펠 수사는 사람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잃지 않는다.

'반란의 여름'편보다는 시리즈 전체에 대한 감상이 되어버렸지만, 범인 찾기나 트릭을 알아내는 재미는 떨어질지 몰라도 (사실 캐드펠 시리즈에서 살인범은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려하게 굽이치는 역사의 한귀퉁이, 섬세하고 따스한 사람들과 생활 묘사만으로도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캐드펠 수사는 10권을 넘어선 시점에서 에르큘 포와로, 브라운 신부와 함께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으로 등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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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필립 K. 딕의 SF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유영일 옮김 / 집사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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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딕의 작품이, 그것도 본래 그의 장기인 단편집이 소개된 것은 너무나 반갑고 기쁜 일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죽은 자가 무슨 말을>을 다 사서 읽고 느낀 안타까움도 만만치 않았다. 좀 더 일찍, 적어도 10년은 빨리 들어왔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 아직도 그의 단편에 드러난 재기와 어두운 상상력은 녹슬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글을 보고 감탄하기에는 시대가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범죄예방시스템, <죽은 자가 무슨 말을>에 나오는 반생명체, <도매가로 꿈을 팝니다>나 <오르페우스의 실수>처럼 꿈이나 시간여행을 휴가차원에서 판매하는 기술 등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흥미롭다. 테크놀러지로 인해 더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 또한.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번역이다. 번역에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도 아니고 많은 것을 요구할 생각은 없지만 맨 앞에 실린 단편 <아무도 못말리는 M>은 번역 상태가 제대로 읽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또 <도매가로 꿈을 팝니다(토탈리콜 원작)>나 <두번째 변종(스크리머스 원작)>은 이전에 SF단편선으로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는 대표적인 단편인데, 이전의 번역에 비해 소름끼치는 느낌이나 힘이 부족한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세번째 단편집을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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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Z
야마다 에이미 지음, 이유정 옮김 / 태동출판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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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운 정이 고운 정보다 강하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에 아직 3분정도 무게를 남겨두고 있지만, 나머지 7분은 역시 아리송한 심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운 정이란 그냥 툭탁거리고 티격태격하는 가벼운 시트콤 같은 가족과 친구의 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서 좋은 점만 빼먹는다면야 당연히 단 음식이 질리듯 사는 게 재미없지 않겠는가. 내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미운 정은, 서로를 끈덕지게 싫어하고 증오하고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그런 집착과 애증이다.

기성 세대는 이런 발언에 '그러니까 너희가 신세대지'라든가 '아직 어리구나'라는 말을 해 줄지도 모른다. 때로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정과 한이 뒤얽히고 애증이 함께 하는 끈적한 정- 분명히 그쪽이, 인생을 더 잘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나는 역시 자유로운 사랑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집착하지 않고, 지나치게 소유하려 들지 않는 사랑.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단념할 줄 알고 어차피 짧은 생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삶을 내거는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에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은 즐거움이 있다. 예전, 처음 단편집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그저 가벼이 읽고 지나가는 정도 작가였던 그녀는 몇년이 지난 지금 내게 꽤 괜찮은 소설가가 되어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추천과 함께 돌아왔다. 좁은 자취방이나 여행을 떠난 열대의 섬에서만 이루어지던 자기 안의 자유가 이제 밖으로 향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 책은 후속작 '애니멀 로직'에 비하면 역시 소품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소품 나름의 잔재미가 쏠쏠하다. 절대 초라하거나 누추해지지 않으려는 작가와 주인공의 협동심에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뭐 멋내고 폼내고 당당하게 살겠다는 게 나쁠 건 없잖은가. 그것이 초라하고 어두운 뒷면을 무시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 그리고 한 가지 덧붙임. 이 책이 나왔을 때 일본의 팬들이 그 낙관성에 놀라 '이건 야마다 에이미가 아냐'라고 했다는데, 애니멀 로직을 먼저 봐서인지 그런 느낌은 없었다. 작가도 드디어 나이가 들어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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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얼굴
니겔 발리 지음, 고양성 옮김 / 예문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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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끼리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서로 엇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지식을 지닌 친구들이었던 만큼, 명확한 결론을 얻어낸다기보다는 부담없이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남의 생각을 듣는 난상 토론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처 신화와 종교가 왜 존재하는가에 끈질기게 매달리던 친구 하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역시 난, 신화나 종교는 다 죽음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봐.'

그 말에는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람은 왜 죽는가? 그 질문을 빼고는 우리가 왜 사는가를 물을 수 없다.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동전의 앞뒷면처럼 삶과 붙어있다는 사실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신은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죽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죽음이 존재하며, 언제든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수 있음을 안다. 죽음을 내세로 가는 통로로 여기는 이도 있고,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죽은 혼이 귀신이 된다고 믿는 이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경험한 순간부터.

아, 거창한 이야기는 그만두자. 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죽음에 대한 철학을 구구절절 풀어보려고 한 게 아니다. 그저 이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며, 또 저들에게는, 또 그들에게는 어떤 현상인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의 순간만큼 인간성의, 그리고 문화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은 달리 없다. 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기간에 마을에서 장례식이 치뤄지면 운이 좋았다고 여긴다. 현지인들에게 불길한 일을 좋아하는 까마귀라고 불린대도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만, 장례식이라는 절차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장례식만큼 마을 사람들간의 인간 관계가 뚜렷이 드러날 때가 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죽음만큼 삶을 잘 비추는 거울은 없다는 말이다.

<죽음의 얼굴>- 개인적으로는 '무덤에서 춤추기'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들지만- 은 어찌 보면 잡기에 가까운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가 조사 중에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를 나직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저명한 학자의 근엄한 진술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죽음의 기원에 대한 동화같은 신화들이 나오고 뒤이어 신문에 실린 기사 한토막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과거에서 현재, 미국에서 아프리카까지 온갖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죽음을 둘러싼 삶의 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것이 이 책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기록들. 그리고 그것은 학자들과는 무관하게 다른 이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준다.

수필과 기획 기사 중간쯤 위치한 듯한 애매함이나 산만한 구성이 딱 마음에 차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처럼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고 삶에서 밀어내려 하는 시대에 이런 책 한권쯤 봐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관심이 생긴다면 더 찾아보면 더 좋겠고 말이다. 내용은 쉽게 읽을 수 있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번역을 맡은 이가 인류학과 무관한 까닭에 일부 문장이 맥락이 닿지 않는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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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씨의 결혼 서문문고 178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 서문당 / 197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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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곡을 좋아하지 않는다.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때로는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묘사도 하나 없이 대사만으로 이어지는 상황과, 인물들간의 팽팽한 긴장감 - 종종 이해할 수 없는 - 과 재치,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한정되어 있는 무대. 대체 뭐가 재미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희곡이란 따분한 장르다. 그것이 내 믿음이었기에, 이 책을 추천받고 또 선물받아서 읽으면서도 마음은 내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이렇게 통쾌하고 재치있을 수가! 빠른 사건 전개와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 그리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통렬한 비판은 그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케 했다. 특히 이 책 표제작인 '미시시피씨의 결혼'보다도 뒤에 있는 '로물루스 대제'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무릎을 쳤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로물루스는 로마가 게르만인의 손에 함락되기 직전에 닭이나 치며 무심히 살고 있는 마지막 황제로 나오는데,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태도와 대사들이 중요하다.

감탄한 대사들 중 일부를 적어보고 싶지만,진정한 묘미는 앞뒤 정황을 함께 읽어야만 와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겠다. 짧고 가벼워 지하철에서 읽기 좋다는 장점도 있으니 읽어보시길. (...이러니 꼭 책장사 같군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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