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땅, 보이지 않는 자들 - 알려지지 않은 쿠르드족 이야기
힐미 압바스 지음, 조경수 옮김 / 이매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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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 온라인에 돌아다니던 지도를 기억한다. 아마 미국인들이 본 세계 비슷한 제목이었을 것이다. 미국만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그 외에는 소수의 '우방'과 '적'만이 모호하게 존재할 뿐인, 수많은 나라와 그 안의 문화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도.

"마음의 땅, 보이지 않는 자들(힐미 압바스 지음, 조경수 옮김, 이매진)".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있는 쿠르드족의 서사시를 기록한 이 책을 잡으면서 문득 그 지도를 떠올렸다. 하기야 미국 외에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는 미국인들의 오만함을 비웃기에는 우리 역시 너무나 편협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세상에 내가 알지 못하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라나 민족의 이름을 안다고, 혹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다고 착각하는 일조차 수없이 많으니 알지 못하는 것들이야 오죽하랴. 

개개인이 전세계의 모든 문화와 민족에 대해 알 필요는 없으며, 그런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그 방면의 전문가로 족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알고 사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알려지지 않은 쿠르드족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을 다 읽고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다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사명감을 품고 읽으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멀고 낯선 세상들을 한 조각이나마 들여다보는 재미를 모른다는 것도 아까운 일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다.

이라크 파병지 때문에 조금은 귀에 익은 이름이 되었을까. 쿠르드족은 현재 이라크에 약 300만 명, 터키에 1000만 명, 이란에 500만 명, 그밖에 시리아 및 구소련 아르메니아 등의 지역에 4천 5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숫자를 가지고 말한다면 절대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이 붙을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8천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쿠르드족 주체의 독립국이 존재한 적 없기에 이들의 입장은 철저히 '약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쿠르드족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듯, 이 책을 읽다보면 조로아스터교,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마니교는 물론이고 현대적인 종교 해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과 신화와 교리가  아른거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창조에서부터 이어지는 여러 줄거리는 구약과(정확하게는 그 이전에 존재한 수메르 신화와) 비슷하고 빛이 창조됨과 더불어 어둠이 생겨났다는 대목은 조로아스터교를 떠올리게 하며 줄곧 강조되는 '결과들의 사슬' 같은 철학은 천도(天道)마저 연상시킨다.

뿐인가. 인간이었다가 죽어 신성을 얻은 탐무즈가 돌아와 던지는 질타 - "현인 중의 현인들조차 삶의 가장 간단한 법칙인 상호 관용과 존중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류가 언어들의 암초와 관념의 다양성, 민족들의 경계와 피부색의 다양성을 극복하겠느냐?" - 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비추는 듯 뼈저리게 다가오며, "...그 중에 단 한명도 무한한 자유만이 신성의 개념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같은 대목은 불교 이래의 인도 전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복합에 서구적인 성찰이 더해져 있다는 점에서, 이 서사시의 몇몇 부분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쿠르드족 출신이었음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점에서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란 조금씩 수정되기 마련. 이 책에 쓰인 이야기들 역시, 저자가 선조들로부터 전해진 대로 '외웠다'고는 하지만 매번 조금씩 살이 붙고 새로운 생각이 가미되었을 것이다. 강자와 약자, 관용의 부족, 서로를 증오하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철학들을 찬찬히 읽다보면 특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마음의 땅으로,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절실한 마음은 물론이고.

"그리고 자기들의 나라에 시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비국(非國), 또는 무인지대라는 뜻이었다."

시움은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고 현인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다가, 모든 민족이 신을 버리고 그 대가로 세운 독재자 아래 신음할 때 유일하게 그에 맞서 싸운 나라로 나온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쿠르드족이 원하는 자신들의, 자신들만의 나라가 아닐까. 역사적으로나 신화적으로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말이다.

저자인 힐미 압바스는 압바스 왕가 혈통으로 쿠르드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독일에 살면서 어린 시절 외운 이 전승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국내판은 독일어 번역인데, 번역이 다소 딱딱하고 조심스러운 데다 특히 앞부분에 관념적인 서술이 많아서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은 각오해야 한다. 3백쪽이 조금 넘는 책 안에 창조신화,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자비로운 신과, 대홍수,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땅을 찾아간 이들의 이야기, 수많은 사제와 신전이 창궐한 시기, 망각의 시기, 신들을 버리고 무서운 독재자를 세운 뒤의 암흑기, 그리고 그 지배에 대항하여 싸워 이긴 이들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고 이 많은 이야기에 철학적인 사색까지 함께 담겨 있으니만큼 쉽고 편하게 읽힌다면 더 이상한 일이리라. 그러나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과 들어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면 모두 그렇듯,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그 인내심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우리의 신이 되리라"고 외치며 신을 모두 버리고 대신 신인을 자칭하는 독재자 밑에 엎드린 75민족이 산악민족(쿠르드의 뿌리로 여겨지는)과 벌이는 전쟁과 그 결말에는 장엄한 비극의 무게마저 담겨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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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무당과 춤추지 않는 무당 (양장)
아키바 다카시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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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0년대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나라 무(巫)의 습속을 연구했던 일본학자 아키바 다카시의 논문을 묶어 출판한 책. 생각 외로 쉽고 재미있게 썼다는 점, 그리고 지금에는 찾기 힘든 자료들을 꼼꼼히 적어놓은 점 등을 높게 평가할 만 하고, 흥미로운 추측이나 시각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흥미로운 추측이나 시각"일 뿐이라는 점을 읽는 사람들이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전에 읽은 1970년대 민속 연구 논문에서도(미국인이 쓴 글이었다) 아키바 다카시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한 것을 볼 수 있었고, 번역자가 우려섞인 목소리로 말했듯이 심지어는 아키바 다카시의 글에서 인용했다는 말도 없이 거의 표절에 가까운 논문을 쓴 민속학자가 있었다. 물론 그때부터 다시 2, 30년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도 그때의 족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큰 문제 아닌가.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 적절한 이해와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그 연구내용을 인용/재고찰한다면 또 다른 얘기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점령자의&아직 근대화의 신화가 지금보다 강하던 시기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찰자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가 일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작정 불신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아야 하니 어렵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그런 점들을 잊지 않는다면 흥미롭게 볼 만한 책이다. 특히 관찰 내용 중에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이제와서는 풍습이 많이 변해서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힘들고 따라서 학술자료로 쓸 때에는 신경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재미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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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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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을 다 읽기까지 (그러니까 2부 초입까지도) 내 감상은 딱 두 줄이었다.

책이 예쁘다.
내용(글, 그림 통틀어)이 귀엽다.

바로 앞에 읽은 다른 책이 워낙 훌륭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전반부가 후반부보다 못했던 건지, 아무튼 2권으로 들어가니까 훨씬 재미있어지더라.

재미있게 읽고 깔끔하게 책을 덮긴 했는데, 대단한 잔영이 남는 소설은 아니었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멋진 상상의 세계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시종일관 저만치 거리를 두고 화면을 지켜보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책 속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가지치기 이야기들도 그 자체로 내 머리속을 떠돌기보다는 이 책 속의 이야기 하나의 완성에만 종사하고 있다는 느낌. (네버엔딩 스토리에서 슬쩍 언급하는 이야기들이 머리속을 어지럽힌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러니까 감상을 한 줄 더 추가하자.

책이 예쁘다.
내용(글, 그림 통틀어)이 귀엽다.
잘 썼다.

기발하고 멋진 상상력에 대한 감탄은 두번째 줄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읽는 동안 얻은 즐거움을 생각하면 별 세 개는 너무하다 싶지만, 딱 별 셋 반을 주고 싶은데 그렇게 매길 수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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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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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쪽 읽다가 덮어놓았던 책을 다시 펼친 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몰두하면 잠을 잘 수도 없이 쑤시는 다리에 대해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몇 줄 읽고 바로 그건 무리한 기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추리소설을 몰아읽을 때 사놓고 이 책만 따로 묵혀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이건 쉽게 술술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고, 내 분류 기준에 따르자면 장르 소설이 아닐지도 몰랐다.

SF, 팬터지, 동화, 로맨스, 무협, 추리, 스릴러, 역사... 꽤나 세세하게 구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에게 소설을 비롯한 여러 매체는 두 부류로만 나뉜다. 신경을 당겨서 읽는 책, 느슨하게 읽는 책.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작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작품. 특별히 어느 쪽이 재미있다 없다도 아니고 가치있다 없다도 아니고, 그저 충분한 에너지가 없을 때는 볼 수 없는 소설/영화/기타 등등이 있고 그럴 때 오히려 충전지가 되는 소설/영화/기타 등등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장르 소설은 많은 경우 후자에 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밀라...'는 장르 소설이 아닐지도 몰랐다.

쓸데없이 길게 설명했지만 결국은 이 책이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소설이었다는 얘기다.

하필이면 정신을 집중해서 뭔가 하는 것이 무리인 상태에 이런 책을 잡다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이틀에 걸쳐서 느릿느릿 스밀라를 따라갔다. 확실히 그 정도 매력은 있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걸작이라거나 너무 재미있었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쩐지 한 번 더 읽어봐야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딱 잘라서 '이러이러했어'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지는 찜찜한 기분. 그러나 여전히 읽을 만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은 상태.

단순한 감상은 적을 수 있다. 누구나 말하듯, 스밀라가 정말 매력적이었다는 이야기. 이건 사실 추리소설이 아니라는 이야기. 읽기 전에는 이게 이렇게 하드보일드인지, 이렇게 스케일이 큰지 몰랐다는 이야기. 빛나는 구절이 많았다는 이야기. 읽으면서 영 호흡이 맞지 않아 힘들었다는 이야기......결국 컨디션 문제가 겹쳐서 생긴 망설임일까? 아니,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의 호흡은 정말로 독특하다.

그놈의 찜찜한 기분을 해결해보려고 이렇게나 길게 내용없는 얘길 써봤지만, 여전히 해결은 안났다. 역시 한 번 더 읽어봐야 할 모양이다. 호흡을, 혹은 방식을 달리해서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다시 읽어도 별 다섯 개를 매기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별 셋은 도저히 줄 수 없을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찬찬히 곰씹게 되는 소설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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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도깨비가 간다 - 도깨비에 관한 민속학적 탐구
김종대 지음 / 다른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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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에 대한 오해, 전설, 민담, 가설을 두루 훑은 깔끔한 책이다.

저자는 지금 흔히 생각하는 도깨비의 모습은 일본의 '오니(鬼)'에서 온 것이며 혹부리영감 이야기 역시 일본이 의도적으로 가져온 민담이라는 점부터 짚고 넘어간다. 뒤이어 중국의 '독각귀' 역시 도깨비의 근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렇게 여러 오해에 대한 안타까움을 덜어낸 다음에는 한국 전통의 도깨비가 어떤 존재인가를 각종 민담과 구비전승과 관습을 통해 찾아나간다.

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고...... 보너스로 이걸 읽고 나서 만화 '도깨비 신부'를 다시 보니 새로운 재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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