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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
아리엘 골란 지음, 정석배 옮김 / 푸른역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가끔 서점을 둘러보다가 "아니, 이런 책이 나오다니?" 하고 눈을 의심할 때가 있다. 그다지 풍요롭다고는 하기 힘든 국내 출판계에, 그 중에서도 상당히 척박한 분야에, 훨씬 기본적이거나 고전적인 텍스트도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척 보기에도 공은 많이 들고 이득은 별로 없을 듯한 책을 보았을 경우다. 해외에서 많이 팔렸다는 명분도 없고, 누구나 아는 고전으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면서 '좋은' 이런 책이 번역 출간될 때는 그저 관계자들의 취향에 감사할 수밖에 없나니, 지난 6월 서점에 깔린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원제 Myth and Symbol: Symbolism in prehistoric religions)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1200쪽이 넘는 무겁고 뿌듯한 장정본을 보면 바로 짐작이 가겠지만 이 책은 '신화 상징 백과사전'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방대한 내용을 자랑한다. 우선 시간적으로는 구석기시대부터 19세기까지를,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하되 전세계를 가로지르며 동굴 벽화와 그릇 문양과 건축과 장식 문양을 총망라해놓은 그림이 압도적이다. 아직 의미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거나 기존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는 몇몇 상징에 대해 재해석을 내리는 전반부에서는 수많은 그림을 헤집으며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할 정도다. 그리고 이 방대한 문양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비교 분석한 신화와 역사, 고고학적인 발견과 언어학적인 자료, 축제와 풍습과 민담과 속담과 장신구와 건축 등에 남아있는 잔재들 또한 입이 딱 벌어지는 양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쳤다면, 그러니까 단순히 그림과 도상만 모아놓았다면 1995년 열화당에서 출간한 조르쥬 나타프의 <<상징, 기호, 표지>>과, 자료를 쌓고 기존의 해석을 정리하는 데 그쳤다면 1994년 까치글방에서 출간한 진 쿠퍼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상징사전>>과 차별성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 모든 자료를 통해 저자 자신만의 해석과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우선 몇 가지 가정에 기초하여 신화, 상징의 뿌리를 찾아 올라간다. 그 가정이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부분적인 해석에 필요한 가정들은 생략하겠다)

첫째, 대부분의 문양에는 원래 상징적인 의미가 존재한다.
둘째, 비슷한 상징은 공통의 기원을 갖는다. 즉 같거나 비슷한 문양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될 때 그것이 우연의 결과일 가능성은 없다.
셋째, 상징의 의미는 오독과 전파에 의해 잊혀지거나 변할 수 있다.

이런 가정에 동의하든 않든 저자가 자신있게 내놓은 몇 가지 결론과 그에 이르는 과정은 상당히 그럴싸하다. 본래 태양숭배는 그렇게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기존에 태양으로 해석하던 원판형 기호 대부분은 하늘 기호일 것이라는 점이 그렇고, 시대가 변하면서 신앙 형태가 변하고 그에 따라 옛 기호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가설이 그렇다. 그보다는 훨씬 신중하게 받아들여야겠지만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민에게는 크게 큰여신(하늘여신) - 그 배우자인 큰신(지신, 지옥신) - 그들의 자식인 쌍둥이신(성장의 신)이라는 세 가지 거대한 신성이 존재했고, 그들 각각이 상당히 모순적인 속성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한 부분도 대단히 흥미롭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문양을 통해 큰여신-큰신-쌍동이신이라는 거대한 신화 공식을 짜낸 다음, 도저히 이 지면으로 정리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를 이 도식으로 수렴시킨다. 예컨대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 기독교에 속해 있는 교리와 연희와 상징과 이야기들 중에 '독자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산타 할아버지와 루돌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될 테고 말이다(웃음)

몇백쪽이 넘어가도록 후대의 이름과 풍습과 신화들이 저자의 해석을 뒷받침하고 그에 따라 재해석되면서 공식은 좀 더 완전해지며, 마침내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또 수백쪽이 이론 정리에 할애된다. 25장 큰여신, 26장 흑신, 27장 백신이 바로 그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큰여신과 큰신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정리하고 또한 몇몇 문화권에서 일어난 '신들의 세대 교체'를 재구성하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같은 범주에 밀어넣다 보니 읽으면서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받아먹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료 면에서도, 문양 해석과 신화적 사고에 대한 가설 면에서도 이 책의 가치는 크다. 저자가 자신의 오랜 연구 경험에 비추어 자신있게 단언할 때조차 신중함을 잊지 않는 학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맨 뒤 100여쪽은 저자가 재구성한 세계관 변화를 다시 설명하고, 이 모든 연구의 뿌리가 된 셈인 다게스탄 문양 연구를, 마지막에는 어떤 문양 해독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것은 추측 수준에 그친다고 여기는지를 정리하는 데 할애되었다. 덕분에 독자는 언제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직접 판단할 수 있다.

솔직히 이런 책을 쓴 아리엘 골란이나, 번역한 정석배 교수나, 출판한 푸른역사나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워낙 두껍고 무거운(들고 볼 수도 없고 무릎에 올려놓아도 다리가 쑤신다!) 데다 집중력을 요구하는 내용이라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만한 고생을 감수할 가치는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상징 관련 서적 두 권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점도 보장한다.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으라고 권하는 데 있어 걸림돌은 두께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가격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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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조셉 캠벨이라고 하면 미국의 유명한 비교신화학자이며, 신화를 단순히 신화 자체로서가 아니라 현대인의 생활과 문화의 맥락에서 해석하려 한 사람이다. 아무리 저술이 아니라 대담기록이라고는 해도 그의 저술에 별 셋밖에 주지 않다니 너무한 걸까? 아니, 그나마 나는 캠벨의 이름에 대한 경의로 원래 의도보다 별 하나를 더 매기고 말았다. 그만큼, 이 책에 대한 내 평가는 높지 않다. 그저 '볼만한 책' 의 수준 이상은 아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조셉 캠벨이라는 사람은 - 왠지 학자라고 평하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묘한 인물이지만 - 때로는 그를 접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그의 책을 성서처럼 받들게 하는 인물이다. 뭐 그정도는 아니라 해도 그에게 매료되어 있는 사람을 직접 본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의 논조는, 학자라기보다는 마음 따스한 노스승처럼 다정하고 자비로운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문제는 그 매력이 나처럼 회의적인 사람에게는 먹혀들기는커녕 묘한 반감을 사버린다는 것일 게다. 인간이 더 나아질 가능성, 더 높아질 가능성에 대한 낙관을 이야기하는 학자라면 같은 노선이라도 엘리아데나 융 쪽이 훨씬 매력적이다. 왜냐고? 캠벨은 너무나 교조적인 때문이다. 그는 까마득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온갖 지방을 종횡무진하며 해박한 신화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이론틀에 근거로 삼고 예시로 들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방식에서 문제는 어떤 '신화'라도 그의 입을 통해 인용이 되고 나면 더이상 본래의 신화가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캠벨이 신화해석자가 아니라 재창조자라고 불렸을까.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그 단점은 장점으로도 작용한다. 그가 인용하는 신화의 단편들은 그 본래 모습과 자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깊이있는 관심을 유도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교조적이면 또 어떤가. 그게 평생이든 순간이든, 방황하던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서 길을 찾는다면 그것 또한 대단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캠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도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역시 캠벨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고,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단, 이 책은 캠벨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인가를 들여다보기에는 좋지만 그의 이론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를. 꼭 다른 책까지 읽어보고 판단하라고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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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여신의 사랑과 분노 - 이집톨로지 시리즈 2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 지음, 용경식 옮김 / 영림카디널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전세계에서 하늘을 여신으로, 땅을 남신으로 묘사하고 있는 지역은 오직 이집트 뿐이다. 어디를 막론하고 하늘은 남신, 혹은 창조신이 차지한 자리였고 대지는 여신으로 묘사되었다. (한가지 더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일본으로, 태양을 여신으로 여기는 것도 이 나라 뿐이다.)

게다가 이집트에서 정식 왕권을 이어받는 것은 '제 1공주'였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물론 그런 이집트라 해도 모권중심 사회였던 것은 아니어서, 공주가 이어받는 왕권은 그 남편을 통해 정식으로 인정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 왕가에서는 파라오가 될 왕자가 자신의 누이와 결혼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동생에 대해 자신의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던 명분 또한 바로 이 점이었다.

유독 이집트만이 - 라는 점은 분명 흥미롭지만,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이집트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 역사적 배경을 분석하는 것이 지금 해야할 일은 아니니 넘어가자. 중요한 것은 그 정도로 이집트에서 여신이 중요했다는 점이며, 저자가 바로 그 점에 주목하여 이집트의 수많은 여신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의 흐름이란 것이 바로 제목에서 말하는 '먼나라 여신', 즉 나일강, 하토르 여신이다. 저자는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나일강과 특히 나일강의 범람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들의 삶이 얼마나 강에 달려있었는지에 주목한다. 생명의 젖줄인 나일강의 범람이야말로 '먼나라 여신'의 귀환이며, 이 여신은 때로는 자애로운 암소로, 때로는 무시무시한 암사자로, 때로는 파라오의 보호자인 두 여신 독수리와 뱀으로, 또 때로는 집안의 수호자인 고양이의 여신으로 변화한다. 저자는 많은 신화와 그 신화를 대표하는 여신들을 거대한 하나의 여신, 생명의 여신의 화신들로 통합해 놓고 있다.

그 시각도 흥미롭지만, 흐름을 따라가며 나오는 많은 이야기와 사이사이 들어있는 삽화며 사진들이 정말 볼만하다. 이집트 신화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던 나도 새로운 사실을 여러 가지 알고 놀랐다. 이집트, 특히 신화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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