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달리기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컴플렉스 중 하나였다.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때 100m를 20초 이내에 주파한 경험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36초도 한 번 기록했던 거 같은데...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기록까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렇게 심하진 않았겠지.
군대에 갔을 때 사실 가장 걱정 되는 것은 군대에 가면 매일 한다는 4km 구보, 기타 무장 행군 등 뭔가 달리기에 관한 것들이었다. 정말 뒤에 한 사람 보다만 잘 해보자는 심정으로 간 군대에서, 어떤 조직에서 내가 그 마지막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신기한(?) 경험도 겪었다. 그런 망신을 당했던 것도 다 달리기 때문이다!!
사실 달리기 뿐만 아니라, 탁구든 야구든 뭐든지 간에 공으로 하는 운동이나 두 명 이상이 함께 하는 운동 중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솔직히 같이 땀흘리며 운동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운동하면서 느끼는 묘한 경쟁심이나 패배에 대한 두려움, 승리에 대한 떨림 이런 느낌들도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그냥 누군가와 함께 운동을 해서 승패를 나누고, 그 결과에 따라 얻게 되는 느낌이 싫다. 누군가와 함께 운동을 해서 이겨 본 경험이 많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한 팀이 되었을 때 언제나 내가 우리 팀 전력의 공백이나 구멍이 된다는 심적 부담도 내가 함께 하는 운동이나 누구와 겨뤄야 하는 운동을 싫어하게 된 이유일 게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누구와 겨뤄서 이겨본 경험이 없는 나는 누구한테 이겨도 별로 기쁘지가 않다. 나한테 진 저 사람에게 내가 대체 뭘 어떻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될지 몰라 안절부절 한다. 글쎄 나에게 운동에서의 승리란 뭔가 일상에서의 실수나 큰 잘 못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스포츠와 같은 경기 운동을 싫어 한다고 하고, 달리기와 같은 기초 체력 운동도 잘 못한다 해도 완전히 운동과 담을 쌓은 건 아니다.나도 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종목은 있다. 누구와 경주해서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수영은 할 만큼은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물 속에 반쯤 잠긴 채 한 레인만 계속 돌다보면, 남은 대체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너무 늦게 돌아 뒷 사람에게 폐만 끼치지 않으면 될 뿐이다. 그리고 수영 말고 '장거리 달리기'도 있다.
달리기가 개판이라 초/중/고 체육 시간이 유난히도 고달펐지만, 달리기를 못해 군대에서도 매번 낙오를 겨우 면해야 했지만, 그래도 장거리 달리기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육상 종목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장거리 달리기를 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마라톤 42.195km 풀 코스를 완주해 봤기 때문일거다.
후달릴 땐 그렇게 싫었던 구보가, 짬밥이 차니 익숙해 지다가 상병 5호봉 쯤 되니 몸에 붙어 체육 활동 시간엔 혼자 달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4km에서 8km, 8km에서 16km, 16km에서 20km로 거리를 늘려가면서 느끼는 만족감과 달리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안정적으로 그루브(groove)를 탈 때 얻어지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도 느껴 보니, 달리기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거 같다. 그렇게 한 6개월을 달리면서 - 아마 내 기억으론 880km 정도를 달렸던 거 같다. - 마라톤 책을 사서 마라톤 공부를 하고 아식스 운동화를 장만해서(아식스는 사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운동에 관련된 장비다.) 마라톤을 준비했다. 마침 내가 달리기의 재미에 한 창 빠져 있었을 때, 제 1회 포항 호미곶 마라톤 대회 참가 신청 기간이 겹쳐 있었기 때문에 마라톤에 참가 할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신성시 하는 마라톤. 42.195km의 장거리 경주. 수 많은 사람과 함께 뛰지만, 선수가 아니라면 아무도 몇 등을 했는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육상 종목. 12월 8일. 아직 날짜도 기억한다. 마라톤 참가 6개월 전부터 마라톤을 준비 했기에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에서 완주 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마라톤에 대해 연구한 덕에 20~30km에 있다는 마라톤의 '벽'구간도 깨고 넘어 갈 수 있었다. 4시간 55분. 나의 첫 마라톤 기록은 보시다시피 아주 형편 없었지만, 5시간을 넘어 엠블란스에 수거되 자동 탈락되는 수모를 겪지 않고 완주를 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함께 출전했던 대대원들 중에 완주를 못하고 탈락한 인원도 꽤 되었으니, 내가 얼마나 기쁘고 자신감을 얻었겠나 이 마라톤을 통해서!
아마 그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나도 장거리 달리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게.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은 달리기를 그만 두었다. 마라톤 후유증으로 몇 년 동안 왼쪽 발등이 아팠던 일도 있고, 장거리로 달릴 만한 코스를 찾기 어려웠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다행히도 얼마 전부터 장거리로 뛸 만한 코스도 찾았고, 달리기에 대한 자극 요소가 될 수 있는 '나이키 플러스' 장비도 구입하게 되었다. 이제 날도 풀리고 있으니, 좀 달려 볼까하고 실실 폼을 잡고 있는 터에 무라카미의 요 신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손에 잡혔다.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마라톤 책으로 많은 도움을 얻었던 일이 생각나, 주저 없이 책을 구입했다. 장거리 달리기에 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생각과, 달리기를 주제로 자기 인생을 풀어 내는 걸 보면서 나도 언젠가 이런 류의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제목은 '나도 달렸다.' 아니면 '나도 달린다' 정도면 좋겠지?
제주도에서 트라이애슬론 경기에 참가한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한 번 참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루키 씨의 얘기를 들어 보니 이게 그리 썩 만만하지는 않은가 보다. 울트라 마라톤도 한 번 참가해 보고 싶었는데....글쎄 하루키씨처럼 16시간 안에 들어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다만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건 나도 하루키씨처럼 매일 10km씩은 뛸 수 있다는 것이고, 나도 앞으로 매년 마라톤 대회에 참가 할 거란 것이다. 트라이애슬론도 하고, 하루키씨는 해보지 못했을 고비 사막이나 극한 오지에서의 경기에서 달려 본다면 나도 언젠가 하루키씨처럼 책 한권 내 볼 수 있겠지?
'나도 달릴 수 있다.' 뭐 이런 적절한 제목으로 말이지. 장거리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단거리 달리기와 장거리 달리기를 구분해서 말해 준 하루키씨가 고맙고, 장거리 달리기에 대한 그의 열정과 노력이 참 본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그저 하루키씨의 문학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서는 뭔가 느끼는 맛이 덜할 거 같다. 직접 달려 본 사람은 하루키씨가 얘기하는 그 감정의 순간을 안다. 고로 적어도 장거리 달리기를 몇 번은 경험해 본 사람에게 이 책을 한 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적어도 이 책은 상상 속에서 빚어진 소설이 아니라, 삶의 체험에서 우러 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씨의 작품을 뭐 그렇게 좋아 하지는 않아 관심 있게 보지는 않지만, 역자의 우리말 번역이 좀 거슬린다. 그냥....뭐랄까, 하루키의 격을 많이 낮춘다고나 할까....그래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이 나오는가 보다. 좀 더 좋은 작가가 번역했으면 더 좋았지 싶은 아쉬움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