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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계절이 바뀔 때면 엄마와 함께 옷장 정리를 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깨끗하게 빤 지나간 계절의 옷들은 옷장에, 철을 맞은 옷들은 바로 입을 수 있게 손질해 침대 아래의 서랍에 정리하는 동안 이제 맞지 않는 옷들은 현관 앞에서 조그만 탑을 이루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이 직접 작아진 자기 옷을 헌옷 수거함에 넣게 했는데. 옷이 맞지 않을 만큼 많이 자랐다는 기쁨과 함께 누군가 더 입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게 옷을 입었다는 뿌듯함을 안겨주었던 그 일은, 그때의 어린 우리에겐 꽤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헌옷 수거함에서 이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의류 수거함. 어떤 이들에겐 뿌듯함을 안겨주고, 누군가에겐 쉽게 옷장을 비울 수 있게 도와주는 고마운 초록 수거함이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알고 있는 사람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많지 않다. 우리에게 버림받은 옷들은 어디로 향할까?
대한민국 최초의 헌 옷 추적 르포 에세이 〈헌 옷 추적기〉는 의류 수거함 속 옷들의 행방을 쫓는다. 4개월의 시간, 추적기를 부착해 전국의 의류 수거함에 나눠 투입한 153개의 옷들의 발자국을 추적한 책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의류 재활용’의 불편한 진실을 세세하게 풀어낸다. 〈헌 옷 추적기〉는 크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헌 옷의 이동경로와 종착지를 살펴보며,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까지 담아낸 책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많은 사람이 ‘누군가 다시 입겠지’라며 헌 옷 수거함에 옷을 넣으며 했던 막연한 기대는 현실이 아니다. 153개의 추적기로 살펴본 헌 옷의 여정은 대부분 태워지거나 매립지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p.45]
‘헌 옷의 수도’라 불리는 인도의 파니파트. 표백 공장과 염색 공장에서 나온 폐수가 인근 하천으로 흘러드는, 파니파트시 남부의 심라구지란 마을에는 마비 증세와 피부병으로 고통받는 75세의 크리산 랄 샤르마 씨가 살고 있다. 태어나 한 번도 심라구지란을 떠난 적 없는 그는, 마을의 이장을 맡기도 하고 농부로 일하며 누구보다 건강했지만. 마비 증세로 찾은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은 후 14년 째 혈액암 투병 중이다.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게 오염된 물과 토양뿐일까. 파니파트시 동쪽의 표백 공장에서 일하는 25살 노동자 할림. 표백 용수에 담갔다 뺀 섬유를 바닥에 말리는 작업 중인 그는 맨손과 맨발이다. 화학물질이 건강을 해친다는 걸 알면서도 표백한 섬유를 더럽힐까 맨발로 일을 한다는 그에게 주어진 건, 보호 장구가 아닌 정기적으로 처방받는 호흡기와 폐 질환 관련 약이 전부였다.
“(여기 버려지는 옷들은) 쓰이지 않거나 팔리지 않은 옷들이에요. 누군가 가져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태워요. (중략) 공장에서 옷을 소각하면서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이곳 주민들이 겨울에 옷들을 땔감으로 쓰기도 합니다.” [p.87]
소마티를 인터뷰하고 돌아서자, 표백 노동자 할림의 3살배기 딸 하마라가 표백 공장 옷 더미 위에서 당근을 들고 서 있었다. 옷들은 표백 용수에 담갔던 것이다. 옷 더미를 미끄럼틀 타듯이 내려온 하마라는 표백 공장 인근 밭에서 가져왔다며 아빠에게 당근을 자랑하곤 그 당근을 입에 넣었다. 당근을 오물거리는 하마라 뒤로 이어진 공장 주변 밭으로도 표백 용수가 이리저리 흘러넘쳐 있었다. [p.127]
호기심과 함께 읽기 시작했지만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며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진실을 마주하며 느낀 이 불편한 감정은 한동안 떨쳐 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책에 담긴 이야기가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사실이라면.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원인 제공자 중 하나라면. 편치 않은 이 기분 역시 마땅히 우리의 몫이어야 하지 않을까. 결코 가볍지 않고 쉽게 해결하기도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