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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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마태공과 함께 디지털 세탁소 ‘더 빨래’를 운영하고 있는 우식. 그의 일은 의뢰인들의 지우고 싶은 온라인상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다. 눈에 띄게 분명해진 M자형 이마 탓에 처음 보는 초등학생에게 ‘저주 받았느냐’라는 황당한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도시가스와 전기 요금을 제때 내고, 6개월에 한 번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받는 게 부담 없을 정도의 벌이를 유지하는 것 외엔 크게 바라는 게 없는 우식은 어디선가 본 듯한 평범한 어른이다.




다시 찾아온 팬데믹 시대. 어느덧 세 번째가 된 자가 격리 생활에 무료했던 우식은 문득 다른 사람들의 격리 생활이 궁금해지고. 자가 격리 브이로그 영상을 찾아보며 이것저것 검색을 하던 중 휴먼북 사이트에 올라온 《휴먼북 조기준》을 발견한다. ‘격리 전문가’라는 조기준의 소개와 무료 미리보기로 제공된 첫 챕터에 호기심이 생긴 우식은 열람 버튼을 누르며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팬데믹과 자가 격리, 확진자와 접촉자. 시간이 흐르며 조금 무디어졌지만 우리 기억 속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단어들이 이야기에 현장감을 더한다. 박지영 작가의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에서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팬데믹 시대의 자가 격리자 우식과 ‘전쟁 바이러스’로 산골짜기 안전가옥에서 10년 간 격리 생활을 이어간 조기준. 다른 듯 닮은 이들의 이야기는 고립과 유대, 공포와 욕망의 본뜻을 돌아보게 한다.




“저주라니. 내가 진짜 저주를 내리면 무슨 일이 생기는 줄 아니?”

“무슨 일이 생기는데요?”

“아무 일도.”

“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돼. 영영.”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진짜 저주란다.”

[p.12]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인가.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엉켜 있는 엇갈린 진술과 천천히 밝혀지는 진실, 마태공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디지털 세탁소 ‘더 빨래’의 이상과 현실은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진실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고도 오싹하게 와닿았다.




악은 태어나는 걸까 성장하는 걸까. 가끔 우식은 궁금했다. 절대 악의 유전성은 얼마나 되는 걸까. 자신의 아이가 두렵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을 때 그것을 끝까지 감싸는 게 사랑인지 확실하게 단죄하는 게 사랑인지도 우식은 알 수 없었다. [p.87]




박지영 작가의 장편소설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은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사회의 어두운 면면과 민감한 주제들을 담아낸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럼에도 어둠을 직시하고 마침내 희망으로 나아간 인물들의 이야기는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따뜻한 격려로 와닿을 수 있겠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오는 소설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박지영 작가의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과 함께, 바이러스와 죄가 뒤엉킨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저주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보길 권하고 싶다.




“내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갈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절 괴롭혔어요. 그때까지도 안나의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밖에 나가는 순간, 제 몸 안의 전쟁 바이러스가 퍼져나가 면역력 없는 이들을 감염시켜 죽일 거라고만 믿었죠.” [p.12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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