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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머시기 -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평점 :

★
'거시기 머시기'도 그런 탈경계를 나타내는 애매어 ambiguity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그것은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이기도 하다. ··· 우리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이분법으로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그 경계의 반란자들과 동반자가 되고 혼란과 질서가 겹쳐진 그 상태에서 새로운 창조의 힘을 가져와야 한다. 그러니까 '거시기 머시기'나 '카오스모스'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암호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생각 장치라 할 수 있다. [‘여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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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의 통찰에 감탄하게 되는 책, 예리하게 보고 군더더기 없이 담아낸 메시지가 곱씹을수록 큰 울림으로 와닿는 책.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기호학자, 문화기획자, 교육자, 장관. 《거시기 머시기》는 오랜 시간, 다양한 영역에서 말과 글과 책에 대해 이야기해온 이어령 선생의 강연과 대담을 담았다. 책의 제목인 '거시기 머시기'는 저자의 201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 강연에 등장한다.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 이어령 선생의 80년 독서 인생에서 길어낸 말과 글과 책의 힘을 담기에 퍽 알맞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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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우리에게 끝없이 속삭이고 끝없이 책을 읽게 만들고 쓰게 하는 큰 힘을 가진 책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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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 시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 법, 경제에서는 '베스트 원'을 추구하지만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서는 '온리 원'을 지향합니다.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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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이화여자대학교 고별 강연에서 이어령 교수는 처음 대학 입학 시험 감독을 맡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이야기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주제를 묻는 사지선다형 문제에 의심 없이 정답을 찾는 학생들. 이어령 선생은, 정해진 의미란 없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이런 고정관념이나 이분법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먹과 보자기 사이에서 절대적인 승자가 없는 '가위바위보'를 만드는 '가위', 흑과 백 사이의 '그레이 존'처럼. 우리에겐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관계와 공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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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문자로 옮긴다는 것은 혼돈의 어둠에서 질서의 빛 세계로 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붕괴되어가는 소리의 연약함에 모양과 견고함을 주는 것, 시간에 대항하는 용기와 그 장소를 주는 것, 물건을 가리키는 손이 아니라 물건 그 자체의 흔적을 밝히는 빛, 그것이 바로 네 개의 눈에서 생겨난 아이콘 문자들입니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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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네 개나 되는 창힐이 한자를 완성하자 어둠 속에서 귀신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문자의 탄생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된, 어둠의 지배자. 이어령 선생은 창힐의 전설을, 한자 문화권 사람들의 문자관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소개한다. 듣는 것인 '말'에서 보는 것인 '문자'의 단계로 넘어가며 인간은 소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시간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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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문학 예술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종교라고 말이지요. 예술은 철학이나 과학과 달라서 개념적인 의미와는 다른 것인데, 문학이나 시를 자꾸 개념화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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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른다고 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속에서 남녀 성별의 차이, 연령의 차이, 이런 신체적인 차이는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탄다고 해보세요. 10층에 간다고 할 때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애나 어른이나 똑같이 올라갑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 빠른 사람은 알겠죠? 보통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때는 잘 쓰는 사람, 못 쓰는 사람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140자를 쓰는 것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없고 못 쓰는 사람도 없는 겁니다. 140자니까.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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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자 트위터의 시대. 글쓰기와 말하기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요즈음. 지은이는, 모두가 글을 쓰는 오늘날의 평등한 시대에서는 개성을 갖고 사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못 쓰는 사람도 140자는 어렵지 않게 써 내려 가는 시대. 개성 있는 문장을 쓰고 싶다면, 나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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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말하기의 핵심입니다. 뒤쫓아가지 말라는 것.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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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어벙저벙 남들 얘기대로 따라다닐 거면 뭐 하러 살아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알아야 해요.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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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보고 어린아이가 말해요, "용이다!" 그러자 홍수에 떠내려가던 뱀이 용이 되어 승천했어요. 어린아이는 아무런 선입견이 없어요. 그러니 뱀을 보고 "용이다!" 하니까 진짜로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거예요. 뱀을 보고 용을 만드는 것, 그것이 창조적 상상력, 언어의 힘인 겁니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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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만난, 온통 일본 말로 된 교과서와 책.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 담긴 책을 마주한 저자의 경험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오랜 시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낸 삶에서 길어낸 이어령 선생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그동안 무심히 지나친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에서 뻗어 가는 종이의 발상이나 구텐베르크 활자와 한국의 동銅활자로 들여다본 책의 역사도. 배고파 죽고 피곤해 죽고 좋아 죽는, 극상의 긍정어로 '죽음'을 사용하는 한국인의 말도. 이 책에서는 모두 만날 수 있다. 우리 주변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말과 글과 책. 그 안에 담긴 '언어'의 힘을 이어령 선생의 강연을 모은 책 《거시기 머시기》와 함께 만나 보는 것은 어떨까?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