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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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종언을 원했고 우린 증언했다.
1996년 2월 16일. 헌법재판소는 5·18 특별법을 합헌 판결했다. 
아주 반응이 뜨거웠는지는 모르겠다. 두 명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여럿이 법원으로 갔다.
어떤 어른들은 소주를 마셨을테고, 어떤 어른들은 멱살을 잡았을는지도 모른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세상엔 그것말고도 재밌고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지, 로 그날을 기억했다.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 




1.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전라남도를 ’본’ 적이 없다. 지나간 적은 있다. 지나긴 했는데 본적이 없다니,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으리라 본다. 여기엔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고등학생 때 갔던 제주도 수학여행은 비행기로 출발해서 배와 버스로 도착했었다. 배는 완도에 우릴 내려줬던 것 같다. 기억은 여기서부터 좀 몽롱해지기 시작하는데, 그건 내가 배에서 내리 잠만 잤기 때문이다. 수학여행하면 떠오르는 로망 때문이라고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다. 놀랍게도 한 번 불붙기 시작한 잠은, 배에서 버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달아나지 않았고 덜덜거리며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할 때쯤엔 기다렸다는 듯 몰려왔다. 그렇게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진 소년 다수를 태운 버스는 전라도를 지났다. 눈을 떴을 때는 충남 어디쯤을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덕분에 전라도에 대한 내 기억은 3년이나 유보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참 희한하게도’ 나는 대학을 전남 순천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희한함 속엔 ’거기가 어디냐’ 는 물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원서를 쓰기 전까지 우리나라에 순천이란 곳이 있는 줄 몰랐었다. 물론 지금은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되었지만. 원서를 쓰고 나서 사회과부도를 펼쳐놓고 난리 부르스를 추던 기억이 난다. 

1, 2지망 대학을 모두 떨어지고 내게 남은 것이 정녕 재수인가 탄식하고 있을 때, 운명같은 전화벨이 울렸다. 그날과의 인연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운명같은 통화에서 난생 처음으로 ’오리엔테이션’ 이란 말을 들었다. 그것도 ’신입생’ 이란 단어가 앞에 붙은. 지금에 비하면 꽤 순수했던 시기였기에 그런 행사란 반드시 가야하는 줄로만 믿었고, 망설임없이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더랬다. 9시였는지 10시였는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그 ’오리엔테이션’ 이란 게 오전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아주 오래된 시간을 추억하는 말 같아 우습지만, 당시엔 충청북도 청주에서 전라남도 순천까지 하루 안에 오전 도착이란 불가능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단 하나의 방법은 ’전날 밤 출발’ 이었다. 광주에선 순천가는 버스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한 터였다. 그날 이후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이 변했다.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광주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순천행 버스가 끊긴 시간이었고, 많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갈 곳을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그 모든 사실을 안고 터미널 근처 여관으로 향했기 때문에.


그날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여관이란 곳에서 숙박이란 것을 했다.
듣기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전야였다. 광주에서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가장 예뻤을 때』, 254쪽.




2.
치우치지 않고, 매몰되지 않고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삶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오직 죽음뿐이다. 알면서도 외면하니, 왜곡은 촘촘한 삼단논법의 결론처럼 피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섭다. 그날과 관련된 말을 하는 것도, 그날과 관련된 책이며 영화며 노래를 접하는 것도. 이 책을 완독하는 일도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문학개론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수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강의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헷갈리지만 강사님만은 또렷이 기억나는 강의였다. 대학생의 자유란 것를 철모르게 오독하고 있던 시기에 수업의 일환으로 광주를 찾았던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독특한’ 이나 ’젊음’ 이란 말 또한 내 식대로 오독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여’ 지길 바랐던 것 같다. 발표수업 시간엔 내용도 없으면서 그럴듯한 노래를 목청껏 불러 그럴듯하게 보여지길 바라거나, 나보다 열살도 넘게 차이나는 형님과 그럴듯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럴듯하게 보여지길 바라곤 했다. 그런 만용의 시기에 광주를 찾게 된것을 어찌보면 운명,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서웠다. 망월동에서. 이름없는 무덤, 붉은 흙 앞에서 무서웠다. 추모관 비슷한 곳에 걸려있던 그날의 사진, 죽음 앞에서 정말로 무서웠다. 잔혹하게 파헤치고 찢겨진 사람들. 시리도록 하얗던 드러난 뼈들. 그토록 하얗던 국화. 그날도 환하게 떠올랐을 해를 보면서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 순간에 스쳐갔던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적어내려갈 수 있을까. 그것은 지금 해야할 말이 아님을 느낀다. 시대의 증인들은 아직도 토해내는 중이다. 이미 토해낸 것들에서 그날을, 내게 스쳐갔던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심장이 가렵다.




3.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기 전에 지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 치우치지도, 매몰되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오롯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도 치우치고 매몰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무사하진 않으나 살아남은 자의 부채, 라고 말하고도 싶으나 아는 바가 많지 않다. 

이 책은 더 무슨 이야기를 보탤 수 있을까, 하고 얹혀진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덜어내기에 가깝다. 견고해보였던 막을 걷어낸 무대 뒤 이야기다. 그날이 너무 묵직해서, 그 무게만큼 가라앉혀야 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지. 슬프며 기쁘고 안타까우며 애틋했을 긴긴 밤이 그려진다.

떠난 이도, 남겨진 이도 시절의 청춘이었다. 똑같이 사랑할 줄 알고, 똑같이 노래부를 줄 알며, 똑같이 술을 마실 줄 알던 청춘들. 

"우리는……아직 좀더 흔들려도 좋을 때잖아."
                        -같은 책, 300쪽.

그들이 가장 예뻤을 때, 우리는 가장 예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가장 예뻤을 때, 우리는 가장 부끄러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젊음의 초상이고 청춘의 자화상, 결국 사랑의 이야기이며

성장소설이다     

,고 말하고 싶다.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안타까운 거리만큼,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이환과 보낸 세상물정 모르던 시간들은, ’내 가슴에 은하수 흐르던 시절’들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그 시절은 내게도 오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환에게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절이 그렇듯, 목련이 지듯, 모란이 지듯, 속절없이 지나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시절들이 밀려오게 되어 있다.
                        -같은 책,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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