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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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모든 게 책으로 보여. 세상도 사람도 모두모두.
                                                  -『위험한 독서』,「작가의 말」중에서

 
현재인 것 같기도 하고, 과거인 것 같기도, 혹은 가까운 미래인 것 같기도 한 김경욱의 단편들을 읽을 때면 과거의 어떤 시간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묵은 ’나’ 라는 책의 시제가 불분명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이, 책을 읽고 쓰는 이 글이 불분명한 내 책의 시제를 찾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너무 넓고 사람이 많은 공간에 서면 나는 두렵다. 말과 글은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시선은 늘 방향을 잃은 채 곤혹스럽다.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인지.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마치 하나의 패러다임처럼, 그것이 확립되기까지 많은 산발적인 선행된 발생이 누적된 형태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한순간의 폭발적인 급진으로 훌쩍, 건너뛰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독서는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 없다.
 
 
1.
세상이, 세상 모든 것이 책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키 작은 아이였던 시절부터 부모님은 책을 사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좁은 집에 제법 많은 책이 있었다. 그 책들을 모두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 독서를 좋아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지금도 유효한 말이지만, 그저 책의 냄새가 좋았다. 책의 냄새는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을 하러 가시고 동생과 둘만 남은 날이면, 그러니까 거의 매일, 책을 성처럼 쌓는 놀이를 하곤 했다. 책 사이를 뛰어다니며 냄새를 맡는 일, 먼지를 들이마시는 일은 좀체 질리지 않았다. 한참을 놀다가 지치면 책을 베개 삼아, 책을 이불 삼아 잠들곤 했다.
 
어렴풋이 세상이 책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어났다. 나는 시력이 꽤 나쁜 편이다. 부모님은 TV와 게임기 때문이라고 믿고 계시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TV를 아주 좋아하지도 않았고, 가까이서 보지도 않았다. 게임은 좋아했지만 바깥에서 뛰노는 걸 마다할 정도로 매달린 적도 없었다. 시작은 한 권의 책이었다. 어느 책이었을까, 혹 '실험과 관찰' 같은 교과서를 보던 수업 시간이었을까.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불가능 하고, 눈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불가능이란 말이 가당키나 할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심리의 기인은 아마 아이들에게 '불가능' 이란 단어 자체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태양을 쳐다본 적이 있다.
 
책이 옳았다. 이건 내가 가진 최초(라고 생각되는)의 위험한 생각이었다. 책을 신뢰하게 된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은 간단하다. 책을 따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감각이 책 속으로 수렴되는 사람이 나는 되었고, 세상은 책이 되었다.
 
 
2.
책으로 인한 최초의 상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떤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피아노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악보라는 책을 읽는 일은 즐거웠다. 읽은대로 움직이면 곧바로 소리가 나는, 책과 현실이 채 한 뼘도 안 되는 독서는 황홀했다. 읽기에 능숙해지면서 간혹 얼토당토않은 읽기를 감행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바쁜 틈을 타 악보를 읽지 않고, 세상이 내던 소리를 애써 기억해내며 읽던 시간들. 어쩌면 그것이 최초의 쓰기,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피아노에도 급수라는 게 있었다. 여러 피아노 학원의 학생들을 모아놓은 뒤에 몇 개의 곡을 무작위로 돌려가면서 연주를 시키고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만약 그때 시험장에 조금 늦게, 아니, 정시에라도 도착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서둘렀던 탓에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시험장에 도착한 것, 시작은 거기부터였다. 강당과 같던 넓은 공간, 단상 위에 놓인 까만 피아노. 선생님은 한 명씩 단상 위로 올려보내 짧게 연습을 시키셨다. 처음 올라간 아이는 이번 시험에 나올 악보를, 늘상 읽던 책을 별다른 동요없이 무난하게 쓰고 내려왔다. 두번째는 나였다. 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짧게 연습을 하라고만 했지, 어떤 책을 쓰라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딩동딩동.
내가 쓴 것은 조악한 나의 이야기였다. 갑자기 아래에서 와, 웃음이 터졌다. 다른 학원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겨우 저런 실력으로 여기에 온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재빨리 시험에 나올 악보로 연주를 바꾸었다. 하지만 당황한 마음은 익숙한 책마저 뒤죽박죽으로 기억하게 했다. 나는 엉뚱한 건반을 두들겨댔고,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연습은 충분했고, 기다리는 다음 아이가 있었다. 이미 붉어진 얼굴이었지만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본 시험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내 연주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끝났다. 무난하게 급수장을 손에 쥐었다. 정해진 책을 참 잘 읽었어요, 라고 말해주는 듯한 급수장을 보자 다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내 이야기는 옳지 않았다.
 
 
3.
현실이 책으로 수렴되고, 책이 현실에 발디뎌 안착하게 된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현실은 책으로 수렴되고, 책은 현실을 휘젓고 다닌다. 내 청춘의 아이들이 어느 곳에서나 헤엄치고 다니는 그 도시, 순천이라는 지명의 도시는 어느 지도에도 표시 되지 않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삐뚤어진 욕망, 정상적이지 않은 독서는 제멋대로 그리움을 만들어냈다. 내가 살았던 그곳의 자취방과 지역의 이름을 딴 여중 근처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은 '갑을 고시원¹ ' 이 되었고, 그곳의 번화가 초입에 있는 맥도날드는 '맥도날드²' 가 되었다. 비틀거리던 그곳의 술집들은 '그 술집³'이 되었다.
 
나의 시제는 갈수록 점점 뒤죽박죽, 헝클어지고 있다. 온갖 책으로 세워진 상상의 도시를 만들며 꿈꾸던 것은 안전하게 숨어지낼 구덩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과거의 어떤 시간들로부터 시작된 페이지가 뒤섞여버린 나, 라는 책을 묻어버릴 구덩이. 부끄럽고 괴로워서 지우고, 찢고, 불태워야만 했던 페이지들. 어떤 것은 너무 빨리 찾아오고, 어떤 것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몸만 자란 소년의 이야기. 밤하늘을 보며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면, 중얼거리던 꼬마와 고속도로 휴게소에 앉아 어서 자랐으면, 중얼거리던 남자.
그들의 페이지.
여전히 위험한 상상을 한다.
당신의 독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매혹적인 책이 되어주겠다고. 위험한 낙서가 되어주겠다고. 어서 나를 읽어달라고. 
 
 
                                                     

1) 박민규,『카스테라』,「갑을고시원 체류기」
2) 김경욱,『위험한 독서』,「맥도날드 사수 대작전」
3)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그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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