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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불패 - 이외수의 소생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9년 5월
평점 :
1.
어릴적엔 참 많은 꿈을 꾸었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뭐가 그리 많았던지. 그 모든 지나쳐간 꿈들을 한때의 치기로 묶기에 그때의 우린 너무 순수했다. 여름날의 소나기같이 금세 지나갈지언정. 그것은 본인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거센 흐름이었다. TV에서 멋진 축구경기를 본 다음날이면 한 반에 열댓 명씩은 장래희망이 축구선수로 바뀌기 일쑤였고, 소방서에서 어린이 안전교육이라도 나왔다치면 또 우르르, 장래희망이 소방관으로 몰려가곤 했다.
그렇게 많은 바뀌는 꿈을 꾸면서 그 꿈들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낙담하지 않았다. 우린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그런 깊은 생각을 했다기보다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린 우리의 마음 속에 '그건 안 될거야.', '그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 따위의 부정적 경계같은 건 없었다.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우리 키가 아주 작았던 시절, 꿈은 가장 꿈다웠다.
슬프게도 우리가 자라면서 삶이 방사형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총체적이고도 구체적인 지각력이 덩달아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작년까지 꾸었던 꿈을 사실은 이룰 수 없으리라는, 지금의 내 성적과 지금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희망이 사실은 모든 얽힘에 의해 소거당하고 남은 것 중에서의 강요라는 절망스러운 현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되었다.
잔인한 세상은 이 고통을 성장이라고 곱게 포장했다. 도대체 포기하는 일이 어떻게 성장인건지, 세상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포기하며 겪은 '성장통' 으로 자란 우리는 '어디 또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며 두리번거리기만 하다 종종 기회를 놓치곤 했다. 잔인한 세상이 보기엔 아무 일도 없었고, 있어봐야 별 일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 믿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꿈을 꾸는 사람들, 있다. 그러나 함께 어른이 된 우리들의 시선은 그들에게 노골적이었다. 그랬다. 우리는 그들에게 몽상가, 부적응자, 허풍쟁이의 입멍¹ 을 씌워버렸다. 그것은 씌우는 사람도, 씌움을 당한 사람도 모두 아픈 일이었다. 모두가 아프지만 왜 아픈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승자는 오직 세상뿐인 듯, 우린 모두 아팠다. 계속 우린 아팠었고, 깨닫지 못한다면 계속 우린 아플 것이다.
2.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육체적으로 아팠다. 떠도는 생활 중에 잠시 친구 방에 정착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갑작스레 바뀐 생활패턴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어이 몸살이 났다. 평소 잘 먹지도 않던 약까지 챙겨먹고 종일 누워 있었다. 밖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번개 번쩍, 우르릉 쾅. 하늘이 꼭 나를 놀려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안에 쳐박혀 있으니 편하냐, 고 살살 약을 올리는 것 같았다. 오기가 생겼다. 이불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갔다. 여전히 번개 번쩍, 우르릉 쾅.
분했다. 언젠가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꼭 손등에 빗방울을 묻혀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그날은 너무 몸이 아팠다. 창가까지 걸어간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안타깝고 분하지만 돌아설 수 밖에 없겠다고 낙담하려는 찰나, 친구의 책장에 꽂힌 한 권의 책을 보게 되었다.『날다 타조² 』라는 이외수 선생님의 책이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다른 책도 많았는데 왜 그 책이 눈에 띄었던 걸까. 왜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 책을 읽으려 손을 뻗었던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날 결국 손등에 빗방울을 묻혔다. 그건 내 마음에 오기 비슷한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용기는 결국 날 밖으로 이끌었고, 변화는『날다 타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3.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차피 세상은 사소한 일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마음, 사소한 행동, 사소한 말에서부터 위대한 것들은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우린 사소한 것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지 않은가. 꿈꾸길 망설이는가. 사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망설이는가. 혹 당신의 꿈이 타박을 받았는가.
너나할 것 없이 우린 모두 아프다. 처방이 필요할 때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거지꼴의 노인이 말했다.
여기, 약 있다.
아놔. 도인이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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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멍에라고 쓰려다가 입멍이라는 단어로 바꿔보았습니다. 입멍은 부리망의 충청도 방언 입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꼬마 시절에 할머니를 따라 소를 끌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소는 진득한 침을 뚝뚝 떨구며 따라왔었어요. 그때 저는 멍에보다도 부리망이 소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부리망은 소를 부릴 때 소가 곡식이나 풀을 뜯어먹지 못하게 하려고 가는 새끼를 꼬아 그물처럼 엮은 것입니다. 소의 주둥이에 씌우는 것인데, 사진을 보면 다들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2)『청춘불패』는『날다 타조』에 이외수 작가가 새로 집필한 원고와 정태련 작가의 그림을 더해 재편집한 개정증보판입니다...라고 책의 맨 뒷장에 적혀 있습니다. 좋은 책이 개정되어 다시 나온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