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1.

늦은 밤, 택시를 탔다. 순천에 내려가 친구들을 만나고 느지막이 올라온 길이었다. 택시타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 달리 도리가 없었다. 호기롭게 택시 문을 열고 기사님께 인사를 한 뒤, 목적지를 말하는데 그날따라 목소리가 참으로 걸쭉했다. 버스 안에서 잠들었다 깨어나서 그런 듯했다.

  어디 일하고 오시는가 보네?

그날따라 옷도 좀 투박해보이는 것들로만 걸치고 있었다. 일하러 다니지 않는다고 하려다가 불쑥 속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광주에서 일하는 친구들 좀 만나고 오느라고요. 공단에 친구들이 있거든요.

어쩌자고 그런 소릴 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일이었다. 내겐 광주 공단을 다니는 친구도, 그렇다고 내가 공장에서 일을 해본 경험도 없었다. 기사님은 본인의 아들이 고3이고, 그와같은 공단에 들어가길 바라고 있다면서 내게 이것저것 묻고 동의를 구하셨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등학교 때 공단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해 본 적도 없었다.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군 시절, 경호경비를 위해 광주공단에 갔던 단편적인 기억에 의지해 나는 거짓말을 만들고 있었다.


 

수줍음도 좀 타는 편이고 의외로 낯가림도 있는 편이라 한번도 택시 안에서 기사님과 그렇게 많이, 흥에 겨워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걸쭉하고 거친 목소리, 시원시원하게 이어지는 문장과 문장들. 잠결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 마치 또다른 내가 있어서 이제야 비집고 나온 것 같았다. 이윽고 택시는 집 앞에 도착했다. 요금은 4300원 정도가 나왔던 것 같다. 나는 4500원을 드렸고, 아저씨는 500원을 돌려주셨고, 나는 500원을 받지 않고 내렸다.


 

이상스런 기분이었다. 분명히 즐겁게 이야기를 했고 여전히 즐거운데 모두 허깨비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어떻게 터미널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거지, 내가 뭘 했던거지, 방금 잠에서 깬 듯 몽롱한 느낌이었다. 마치 시간을 뺏겨버린 느낌이었다. 그 공허한 느낌에 주머니에 괜히 손을 넣었다 뺐다 했고, 가방을 열어 괜히 안에 있는 물건들을 매만졌다. 그런 별 것 아닌 행동으로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확신, 이 서리라 믿었던 것 같다. 가방을 뒤적이는데 책이 한 권 있었다. 커피를 주제로 한 웹툰을 엮어놓은 책이었다. 에스프레소는 마실 줄 모르지만 아주 검고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마시는 맥심 커피가루를 머그컵에 잔뜩 넣고 끓는 물을 아주 조금, 넣었다. 커피전문점 원두만큼의 맛은 나지 않았지만 머리가 아찔해질만큼은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 본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굴었던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쓰디쓴 커피를 마시고 싶어했는지도.


 

2.

따냐, 안나, 월향. 그녀같은 여자는 없었다. 영웅이 되겠다는 망상에도 빠지지 않고, 자기 스스로에게도 먹히지 않았다. 역사에 매몰되지도 않은 여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그녀에게 변하는 것이란 가비, 뿐이었다. 또한 변하지 않는 것도 가비, 뿐이었다. 그녀의 가비는 그녀의 마음을 따라 달고 쓰고 떫어졌다. 그녀에게 가비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흉내를 내는 사기꾼이 아닌, 아버지였다. 안온했던 어린날의 젖냄새였고, 사랑했던 지난 어느날의 날씨였다. 그녀는 가비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어쩌면 이리도 욕심이 없단 말인가. 역사의식, 올바른 윤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스럽다. 욕심이 난다.


 

숨 돌릴 틈 없이 질주하는 이야기를 붙잡아 두고픈 마음은 없다.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 여기지도 않는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이 책을 읽어보면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출간 즉시 영화화' 라는 구절을 본다. 과연 우리나라에 그녀일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따냐, 안나, 월향. 그녀가 된다면, 그녀를 스크린에서 숨 쉬게 만들어 준다면, 어떤 배우가 되었든 그는 새로운 유형의 배우로 종횡무진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녀는 황제도 곁에 둘 수 없었던 여자였다. 잠시라도 그녀를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황제가 되리라.


 

此鳥安可籠哉

이 새를 어찌 조롱 속에 가두랴


 

3.

신파를 말해야겠다.『노서아가비』를 읽고나자 그때의 밤이 떠올랐다. 그 밤, 택시 안에서의 분명하고도 매력적인 목소리, 거칠지만 거침없던 몸짓. 나는 잠시 그녀, 였다. 어쩐일이었는지, 그녀는 내게로 왔었다. 말도 안되는 논리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분명히 그랬다. 어눌한 내 목소리로 사람을 매혹시키기란 불가능했다.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진한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그건 내 입맛이 아니었다. 그토록 검고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잔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로 그녀가 내게 다시 온 일은 없다. 그녀의 느낌도, 향기도 이젠 낯설지만 진한 커피만큼은 익숙해졌다. 그날 이후로 맥심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으나 간혹 아주진한 커피향이 나를 유혹할 때가 있다.


 

새벽, 그녀를 생각하며 진한 커피를 마셔야겠다.

그녀를 위한 가비를 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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