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하드 럭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요시토모 나라 그림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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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모토 바나나’ 는 ’바나나’ 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예끼, 장난치면 못 써.’ 라고 말할 것 같다. 그녀의 글은 진짜 바나나 같다. 껍질을 까면 어라, 소리가 난다. 겉은 노란색이고 녹색인데 안은 뽀얗다. 모 회사의 우유처럼 바나나는 사실 하얗다. 
그녀의 글이 일단 그렇다. 껍질을 까면 나오는 온통 하얀 세상. 그건 동화적인 세계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다. 여기까지 파악이 되면 다시 바나나로 돌아가야 한다. 방금전에 ’일단’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저의를 털어놓아야 하므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빨가면 사과~사과는 맛있어~맛있으면 바나나~

우리는 이 노래를 안다. 
애국가보다 먼저 배웠고, 때로는 한글보다 먼저 익히기도 했으며, 동네에서 좀 논다 싶은 축에 끼려면 꼭 알아야 하는, 이 구성진 가락을 우리는 안다. 너무 완벽한 음악이라 작곡가, 작사가들 마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의 국민가요. 원숭이는 엉덩이가 빨갛고, 사과와 바나나가 맛있다는 사실에 감히 누가 딴지를 걸 수 있으랴! 

바나나가 있다. 껍질을 깐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먹는다. 맛이 있다. 끝.
이 논리대로 따른다면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나나’ 는
먹고 땡, 하는 게 아니란거다. 자, 다시 나열해보자.
바나나가 있다. 껍질을 깐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본다. 시간이 지난다...그리고,
까맣게 된다. 

그녀의 바나나, 그 깊숙한 최종 지점은 바로 이 ’까맣게 됨’ 이다. 

’속이 탄다’, ’속이 까맣게 탄다’ 같은 표현이 있다. 심한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 고통은 예상치 못한 파국이나 상실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흥미롭게도 [하드보일드 하드 럭] 의 인물들은 그런 상태의 한 가운데에 던져져 있다. 그들은 세상이 점차 백에서 흑으로 이동하는 지점에 서 있거나(하드 럭), 이미 흑의 세계에 진입해 있다.(하드보일드) 당연히 읽는 사람들도 던져진다. 
우당탕쿵탕!
뭐, 솔직히 독자가 이 정도 과격한 폭력을 당하는 건 아니다. 어찌됐든 ’바나나’ 아닌가.
어딘지 모르게 유아적인 억양을 물씬 풍기는 저 ’바나나’ 를 보라. 

우리는 노오란 껍질의’바나나’ 를 본다. 겉표지의 삽화는 어딘지 모르게 동화책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책을 들어보니 가볍다. 게다가 얇기까지 하다. 괜찮아 보인다.
우리는 노오란 ’바나나’의 껍질을 벗긴다. 하얀 속살이 수줍게 얼굴을 든다. 목자를 보니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다. 글씨까지 큼직큼직 하다.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바나나’ 를 오래도록 놓아 둔다. 내용이 심상치 않다. 머리를 식힐겸 책을 들었
는데 주변이 온통 검게 변했다. 호흡이 짧은 문장은 숨가쁘다. 인물들의 담담한 대화는
아득하다.

결국 안되겠다 싶어 책을 덮는다. 이건 왁자지껄한 곳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상실의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의 힘겨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삶의 대리경험이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이 책은 자기 스스로 어설프게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바나나’ 의 미덕이다.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겨울이 힘차게, 잔혹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하드보일드 하드 럭』, 135쪽.

힘차게를 받아들일지, 잔혹하게를 받아들일지는 누구의 몫인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 경우가 있다. 다른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어설프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보다 담담하게 비슷한 경험을 말해주는 것에서 큰 위안을 얻는 것 말이다. 이걸 따른다면 ’바나나’ 는 화해와 위안의 달달한 맛이 나리라.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느쪽 의미로든, ’바나나’ 는 전염병처럼 번질 것이다. 우후죽순.
그녀의 글을 굳이 하나로 표현하자면, ’바나나’ 의 역학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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