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2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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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일기

임형주의 하월가(何月歌)란 노래가 있다. 고즈넉한 밤에 창 밖을 보면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 
비 오는 날이 생각난다.

함께 걸었던 인적없는 새벽의 길, 눈이 하얗게 내린 차밭의 풍경속에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서 있는 모습, 가을 단풍이 들던 수목원에서 함께 누워 찍은 사진, 낙안을 다녀오던 버스 안에서 보던 노을, 섬진강 변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어깨에 기댄 채 잠들곤 했던 너의 모습, 비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고 걷다가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던 기억, 심야영화를 보고 나온 후 간판이 모두 꺼진 시내를 걷던 일, 아주 늦은 시간까지 술집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를 약간 취한 눈으로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기억, 부스스한 모습으로 밤 늦게 편의점에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고 돌아가던 그 길, 푸짐한 떡볶이와 순대, 병맥주를 싸들고 학교 운동장 스탠드로 향하던 발걸음, 레포트를 쓰느라 서너시간을 PC방에서 보내고 뻑뻑한 눈으로 새벽 바람을 맞던 기억, 진주를 다녀오던 기차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잠들었던 기억, 보성까지 가는 의자가 높은 통근열차 안에서 숨죽여 했던 짧은 입맞춤, 갈곳이 없어 같은 자리만 몇 시간이고 뱅글뱅글 돌았던 그 새벽 그 거리, 둘이서만 갔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짙푸른 밤바다와 노오란 별들을 배경으로 한 키스까지.

그 시간 그대로를 돌릴 순 없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아름다운  낭만이, 달콤한 꽃향기 같은 기억이 끌려나온다.

나에게 밤은 사색과 허무와 적요가 공존하는 특별한 세계와도 같다.
그 세계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앞도 뒤도 아닌 시간, 시각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세계가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립고 함께여야 하는 밤이다. 

그 남자의 또 다른 일기

이 세상에서 너만큼 나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
또 만날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어.
내가 받은만큼 돌려주기 전까지는 안돼.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돌려줄게.

널 지치게 하지 않을게. 널 내버려두지 않을게.
마지막으로 말만 잘하지 않을게.


그 남자의 낙서

왜 그래.
삶은 항상 중요한 순간에 널 빗겨갔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그리고...어떤 일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왔던 그대
지난 5년간 오로지 나를 향했던 당신의 삶
먼 거리,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던 당신

단 몇 시간을 위해서, 나를 보기 위해 달려왔던 당신을 나는 너무 당연한 듯 대해왔어요.
미안합니다.
당신이 힘들고 아픈데 내가 그것을 안아주지 못해서요.
그 마음 나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내 잘못입니다.

당신을 향한 마음 변함없으나 어그러진 표현이 있나봅니다.

요즘 내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밥을 한술도 뜨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살아보겠다고 밥을 한가득 퍼 담았습니다. 그러다가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당신의 당연한 걱정을 물리쳤던 내가 생각납니다.
미안합니다. 

난 여전히 당신이어야 하고, 당신입니다. 
더 이상 멀리있는 당신을 보지 않겠습니다. 
가까운 당신,
오늘, 지금의 시와 분과 초에 존재하는 당신을 보겠습니다.
기분을 풀고 나를 향해 웃어주세요.

녹아버린 나날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낮잠을 잡니다.
낮잠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운 시간, 오후 7시에 자리에 눕습니다.

늦은 잠, 이라고 해야겠군요.

전혀 피곤하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이끌어 자리에 누이고 불을 끕니다.
지금은 겨울.
방은 한동안 아무것도 구분이 되지 않는 캄캄한 어둠과 정적에 휩싸입니다.
나는 눈을 감습니다. 
.
.
.
나는 갈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그래서, 방에만 있습니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내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갑니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였어요.

그녀는 헤어지는 날, 담담하지만 울음섞인 목소리로 '안녕' 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이 보이진 않았을거에요.
우린, 통화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이후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시간에 잠들었습니다.
알람을 맞춰놓은 것처럼, 정확히 그 시간이 되면 나는 불을 끄고 자고 싶어하지 않는
몸을 억지로 때려가면서 눕고 이불을 덮습니다. 

보지마, 쳐다보지마, 난 괜찮으니까.
이것이 내 자장가입니다.
제발 나를 봐, 돌아서서 한번만 봐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나는 잠이 듭니다.

오늘도, 같은 시간에 잠들고, 같은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씁니다. 


(+)
영화를 봤다.

내겐 뭔가 밝은 것이 필요했다.

아주 오랜만에 밤거리를 걸었다.
날은 추웠지만, 사람들은 많았다.

가게들은 밝았지만,
내게는 필요없는 밝음이었다.

(+)
또 코피가 나기 시작한다,
매일...

(+)
어제는 조금 과음했다.
교수님이 만들어주신 폭탄주에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노래방에서 또 맥주를 마시고,
해장국 집에서 또 소주를 마시고,
집으로 와서 또 맥주를 마셨다.

새벽 4시 하고도 30분이었다.

술김에 엉터리 서평을 쓰고,
이곳저곳 인터넷을 떠돌며 흔적을 남기고,
이불을 깔고,
안경을 벗어놓고,
천장을 보다가,
잠들었다.

10시에 눈을 떴다.
정신은 멀쩡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한 시간을 그대로 있었다.
12시에 짬뽕을 시켜 먹었고,
같이 술을 마셨던 동기들에게 해장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휴대폰을 끄고 다시 누웠다.

눈을 뜨니 
오후 4시 하고도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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