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남자와 그 여자의 비 오는 날

비가 오면 우산을 씁니다. 
둘이 걷고 있지만 우산은 하나여야만 해요.
비는 컨버스 신발 밑창 윗부분이 흠뻑 젖을 정도로 많이 와야합니다.
아, 그래요. 우린 둘 다 컨버스 신발을 신고 있어야 합니다.

걷기에는 조금 멀지만, 차를 타기에는 가까운
그런 거리를 비가 오는 날 함께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그랬으니까요. 
둘 다 걷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이런 날 우리는 그 거리를 걸어 영화관으로 갑니다.
가슴에 잔잔하고 넉넉한 파문을 일으키는 영화 두 자리를 예매해야 하거든요.
시간은 많이, 많이 여유가 있어야 해요.
우리가 영화관에 도착한 시간과 보려는 영화의 상영 시간 사이는 아주 길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
우리가 잘 아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낯익은 사람들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카페를 찾아가서 따뜻한 커피를 시켜야 합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는 없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아도 상관없지만,
자리는 꼭 창가여야 합니다. 

카페에 오래 앉아있다 보면 사장님이 직접 우려주시는 향이 좋은 차를 마시게 될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그 편지는 꼭 연필로 써야만 해요.
비는 계속 내리고 있어야 하지요.
카페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카페에는 몇 안되는 손님들의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려야 합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윙윙대는 노랫소리도 들려야 합니다. 빠져서는 안돼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사각사각 연필소리만 들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이 될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짧은 시간,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겁니다.

영화시간을 20분 정도 남겨놓으면 카페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길을 걸어가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올겁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비가 와서인지, 시간이 늦어서인지 살짝 어두울 겁니다. 
한기가 조금 느껴지면 좋을거에요.
그럴때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야 합니다. 비가 오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다시 빗속을 걸어ㅡ비는 하루종일 와야할 것 같아요.
떡볶이를 먹으러 가야합니다. 그곳은 잘 아는 곳이고, 푸근한 아주머니께서 또 왔냐며
반갑게 맞이해 주는 곳이고, 같은 돈을 내도 떡이며 오뎅이며 더 얹어주는 곳입니다.

배불리 먹고나서 우리는 몰래 떡볶이값 2천원 대신 3천원을 놓아두고 도망칠 겁니다. 
다음데도, 그 다음에도...
같은 돈을 내고 먹는 떡볶이의 양은 점점 늘어갈 겁니다.

우린 다시 비오는 거리를 걷다가 가까운 술집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곳이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전망이 좋은 곳에서 비가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상관없을 겁니다.

우리는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고, 많은 말을 나눌 것이며, 
더한 행복은 없을 것처럼 함께 웃을 겁니다.

그렇게 세상은 우리 안에서 돌아갈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