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반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Mr. Know 세계문학 20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가깝거나 멀거나, 우리에겐 과거의 어떤 한 장면을 회상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가진 냄새를 알고 있다. 그것은 향기로울 수도, 역할 수도 있다. 그것이 미소를 짓게 만드는 향이냐,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향이냐에 따라, 끌려나오는 과거의 어떤 한 장면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게 만들거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 냄새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공기중을 둥둥 떠나니다가 잽싸게 비를 피하듯 우리에게 들이닥친다. 그리고 어떤 기억을 몰고 온다. 
어쩌면, 공기 중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억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지도,
당신의 조각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감 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이 후각이라는 사실은 새롭지 않다. 어떤 과정을 통해 후각 세포와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어 뇌에까지 도달하는가 하는 과학적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적 사실을 차치하고도 냄새는 신기하다. 그 작용은 마술같다. 과거의 마술(혹은 과학이었던) 연금술은 이제 향수로 명맥을 잇고 있다. 과학적인 과정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감정의 변이는 마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과학과 마술이 영원토록 만나지 못하는 기차 선로같은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향기라는 것은 좀처럼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그것은 빠르게 잊혀져 가거나, 또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오래도록 기억되기도 했다, 한다, 할 것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나서도 인터뷰나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은둔한 채,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를 역설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향수-냄새에 관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향기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서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은폐하고 고립시킨다는 오해를 받을만큼 드물고 가늘게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그의 심사가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나, 나는 그가 이 책의 주인공인 그르누이처럼 장인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도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제자들이 개미떼처럼 그득한 공방을 가진 마에스트로도 아니지만, 타고난 기질 자체가 장인인 사람.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자기 속의 칼날을 벼리고 벼려 서슬퍼런 빛깔의 글을 써내려간다. 일반 사람들은 그 고독하고 답답한 짓을 왜 하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갯짓을 하겠지만, 실제로 그는 자유로운 상태였고, 상태이며, 상태일 것이다. 
나는 그 앞에서 일반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향기같은 글을 쓴다, 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기같은 글을 쓴다. 공기중에 가볍게 날아와서 귓볼이나 겨드랑이, 허벅지에 내려앉고는 오래도록 그 향기를 퍼뜨리다가 어느새 바람결에 흩어지는 글을 쓴다. 그 향기는 그르누이가 스물 다섯 명의 소녀들로 만든 완전무결한 향수의 향기다. 독자들은 열광했고, 비평가들은 부랴부랴 이 중년의 신인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유래없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현명했다. 그는 그 파도에 몸을 실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완전무결한 향기를 가슴에 그러모아  세상 밖으로 나갔다면 곧 그르누이와 같은 최후를 맞았으리라. 결국 그는 동굴을 택했다.

향수는 또 다른 파트리크 쥐스킨트,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이야기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어떤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공기 중에 가득찬 자신을 맡았을거다. 
어떤 강렬한 장인의 의식을 세례 받았을거다. 그는 연필을 깎을 수 밖에 없었을거다.
그렇게 썼다.
혐오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이야기.
그는 이 이야기를 스물 다섯 명의 소녀로 만들었을까? 

이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나의 조각들과 그의 조각들이 만나서 만들어낸 
또다른 파편에 불과하다. 
고로, 나는, 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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