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어둠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4
제럴딘 매코크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누구나 머릿속에 하나쯤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때, 세상은 우릴 무시하고 어른들은 답답하게 우릴 가두려고만 했던 시절에, 우리는 누군가가 짠, 하고 나타나서 우릴 구해주기만 바랐다. 그것은 실제로 남자친구, 여자친구의 물리적 형태(여기서 물리적 형태란 내가 직접 손을 잡고 뽀뽀하고 껴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온갖 가수며 영화배우들이 줄지어 둥둥 떠다녔다. 어떤 특별한 이는 밤마다 나를 찾아와 밤새 내 옆을 지키다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긴 뒤 사라지곤 했다. 그는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어느새 생방송에 출연했고, 나는 그를 걱정하며 눈물 짓고, 그가 나에게만 보내는 신호를 행여 다른 사람이 눈치채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끙끙 앓던, 그러나 그날 밤 다시 그가 찾아오면 아무렇지 않은 듯 환하게 미소짓는 경우를 말함이다. 

지금도 그렇고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나는 어렸다.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학생이고 20세기를 살았던 그 때도 난 학생이었다.
한 세기가 지나도록 나는 학생인 셈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나는 100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였던거다.
어쩜.

과거보다 비약적으로 발달된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거실에서(혹은 방에서) 전 세계 어딜가나 사춘기의 고민은 고만고만하다는 사실을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등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우, 문장이 길어서 숨차. 그 고만고만한 통일성이 3세계 친구들에겐 해당되지 않을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넘어가겠다.
여하튼 우리는 그런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등을 보면서 숨을 고른다. 
혹은 더 빨리 불을 붙이거나.
어딜가나 번식만을 자아실현의 방편으로 삼는 친구들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뭐, 이해하자. 그 친구들도 그 순간엔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보면 주인공 심은 독특한 친구다. 꼭 서양 친구들이 키스와 섹스만 생각한단 법은 없지만(이 죽일놈의 편견) 대체로 그런 친구들이 많아 보이기에, 심은 이상한 아이가 되어버린다. 아직까지 남자와 키스 한 번 못해본, 애 취급을 받는 것.
타이터스는 나의 오랜 연인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긴 하다. 구십년 전에 죽은 남자니까.
하지만 나도 구십년 안에는 죽을 것이다. 그러니 나이 차이는 문제가 아니다. 뭐든 생각
하기 나름이다. 
평범한 열네 살 소녀. 학교에서는 좀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고, 또래들이 남자와 연애와 섹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극지방에 대한 상상에 심취하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아직까지 남자와 키스 한 번 해본적 없고, 그로인해 애 취급을 당하는, 죽은 아빠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미 죽은 과거의 어떤 남자와 상상으로 대화를 나누는 청력이 나쁜 소녀 시몬. 줄여서 심.

이 이야기는 고색창연한 성장소설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 같지만 의외로 수상한 균열은 불과 50여 페이지만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단순하고 평범한 성장소설로만 보이던 이야기는 '남극' 이 끼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향한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은 누구나 그 순간을 산다. 그 순간만큼 진지한 일은 없었고, 없을 것처럼 산다.
어린시절 풋풋한 첫사랑도 지나고보면 유치하지만 누구나 그 순간은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결국 우리를 만든 건 그와 같은 시간의 일부들이 아니던가. 성장소설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열네 살. 그만한 나이에 배신과 죽음과 사랑과 남극을 모두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견디기도 어려운 일이다. 혹 작가는 사춘기의 격렬한 변화를 그런 고통으로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성장통의 쓴 맛. 
시몬, 심. 이 여자, 떄론 울화통이 터질만큼 순진하고 답답하지만강하다. 
지적이고 똑똑한데다 자기 감정에 충실하기까지 하다. 열네 살 밖에 안됐는데 열 살 차이는 훌쩍나는 청년들이 데이트 신청을 고민할 정도로 매력도 넘친다.
어떻게 나는 안되겠니, 라고 물어보면 전자팔찌 차게 되려나?

이건 소녀로 시작해서 여자로 끝나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